복음: 마태 25,1-13: 열 처녀의 비유
오늘 복음을 보면, 다시 오시는 주님을 맞으러 가고 있는 우리 자신에 대해 깊이 생각하라고 한다. 주님을 만나기 위해서는 등불을 밝혀 들고 혼인 예복을 입어야 한다(마태 22,11-14). 이 때문에 전례 주년 마지막 세 주간의 전례는 신자들에게 항구하게 깨어 기다리라고 한다. “사람의 아들도 너희가 생각지도 않은 때에 올 것이다. 그러니 너희는 늘 준비하고 있어라”(마태 24,44).
오늘 복음의 열 처녀의 비유는 그리스도인의 생활 자체에 있어야 하는 깨어 기다림의 의미를 강조한다. 이 비유의 내용은 신랑의 집에서 신부의 집으로 신랑을 기다리던 열 명의 처녀들에 관한 이야기이다(1-4절). 이야기는 신랑을 기다리다가 잠이 들었던 슬기로운 처녀들과 미련한 처녀들의 비교이다(6-12절). 슬기로움은 신랑이 늦을 수도 있다는 사실을 예견하고 등불을 계속 켤 수 있는 기름을 따로 준비하고, 그것이 열 처녀 모두에게는 부족한 양이라는 이유로 기름을 나누어주기를 거부하는 것이다(9절). 실제로 이익을 가져다주는 대신에 우리에게나 남에게나 해를 끼치는 행위는 사랑이 아니기 때문이다.
처녀들 모두가 신랑이 늦게 오는 바람에 모든 처녀는 “졸다가 잠이 들었다”(5절). 슬기로운 처녀들까지도 깨어있지 못하였다. 처음에 등불을 켜고 신랑을 기다리는 열 처녀의 모습은 초기 교회가 가진 그리스도의 재림에 대한 열망을 나타내고 있고, 나중의 자는 모습은 그리스도의 재림에 대해 방심하고 있는 순간을 말한다. 즉, 초대 교회 시대에 열화와 같던 기다림의 열망이 누그러져 이천여 년간 교회가 처해오고 있는 상황을 의미한다. 이는 깨어 기다리는 슬기로운 자세를 잊어도 좋다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매일의 삶 속에 사랑과 믿음을 실천하면서 평온하게 주님을 기다려야 한다. 이때 우리는 그분이 언제 오시든지 더 기다릴 수 있는 기름이 잘 준비된 등불을 밝혀 들고 그분을 맞이할 수 있다.
그러기에 이 비유는 우리에게 매일 매일의 현실에 열심히 참여하며, 현재를 충실히 삶으로써 미래를 준비하라는 것이다. 이러한 행동적 삶의 의무에 대해 산상설교의 결론 부분의 내용에서도 나타난다. 거기서도 슬기로움과 미련함을 가늠하는 척도는 주님의 말씀을 들으려고 하는 자세만이 아니라 행하려고 하는 자세이다. 이 비유에서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우리가 가지고 있는 선한 의도에 따라서가 아니라 우리의 삶을 통해 드러나는 슬기에 따라 심판하신다는 것이다. 슬기는 하느님께서 원하신 목적이 달성되도록 구체적인 삶 속에서 이루어진다. 등불만으로는 부족하다. 오랜 여정을 위해 충분히 마련된 기름이라는 사랑의 행위가 필요하다. 행동으로 실천되고 깨어 기다림의 자세로 표현되는 사랑에 관한 주제가 이 비유 전체에 혼인의 개념으로 흐르고 있다. 여기에는 신부의 모습은 나타나지 않지만, 주님을 맞으러 나가는 처녀들이라는 개념 자체에 포함되고 있다.
이렇게 예수께서 당신의 돌아오심을 혼인을 배경으로 하는 것은, 당신과의 결정적인 만남이 기쁨과 사랑의 표징 아래 이루어져야 한다고 하신 것이다. 재림하시는 예수 그리스도와의 만남은 혼인의 만남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교회는 그리스도이신 신랑을 더욱 정성스럽게 마음을 다하여 기다려야 한다. 당황하게 된다면 그것은 사랑 때문이어야지 두려움 때문이어서는 안 된다. 하느님 앞에는 두려움이 없기 때문이다. 그분이 두려움을 영원히 몰아내셨기 때문이다(1요한 4,18). “그날과 그 시간은 아무도 모른다. 그러니 항상 깨어있어라.”(13절). 이 말씀은 위협이 아니다. 그것은 사랑 속에 삶으로써 언제라도 당신이 원하실 때, 즉, 우리가 그리스도를 뵐 때, 그분께 합당한 자들이 되라는 것이다. 그렇게 우리가 산다면 그분이 한밤중에 오시더라도 대낮같이 그분을 맞을 수 있을 것이다. 우리의 등불이 환히 켜져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바오로 사도는 우리를 이러한 평온한 기다림의 자세로 이끌어준다. 사도는 몇 가지 근본적인 진리를 상기시킨다. 가) 그리스도인은 죽음 앞에서도 희망을 잃지 않는다(1테살 4,13). 나) 그리스도의 부활은 우리의 담보이다(1테살 4,14). 다) 그러므로 이미 죽은 사람들과 살아있게 될 사람들 사이에는 아무런 차이가 없으며, 오히려 죽은 사람들이 더 먼저 주님을 만나게 될 것이라고 한다(1테살4,15-17). 여기서 살아있는 자들과 살아남은 자들(1테살 4,17절)의 의미는 그들 모두가 주님께서 영광중에 다시 오실 때 살아있게 되는 자들을 의미한다. 이 대목의 메시지는 위로(1테살 4,18)부터의 메시지요, 희망(4,13)의 메시지이다. 그 이유는 첫째, 그리스도 신자에게 죽음은 끝이 아니라, 주님과의 결정적인 영광의 만남이기 때문이고, 둘째, 신자들의 공동체는 죽음 뒤에 다시 모여 부활의 기쁨을 영원히 함께 누리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주님과 항상 함께 있기 위하여”(1테살 4,17)이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이런 말로 위로하십시오.”(1테살 4,18).
그러나 그리스도의 재림을 두고 쓸데없는 생각과 지나친 두려움을 가질 필요는 없다. 사랑하는 마음으로 깨어있지는 못하더라도 다섯 처녀처럼 평온한 마음을 잃지 않고 기다리는 것이 슬기로움이다. 이러한 슬기를 하느님께 청해야 한다. 그분은 그것을 지혜서가 말하듯이(지혜 6,12-16 참조), 그것을 원하는 사람 누구에게나 아주 기꺼이 나누어주실 것이다. 항상 깨어 기다림으로 주님께서 언제 우리에게 오시더라도 기쁨 중에 혼인의 만남과 같이 맞아들일 수 있도록 구체적으로 우리의 삶 속에서 열매를 맺으며 살아갈 수 있도록 하여야 한다. “마라나, 타! 우리 주님, 오소서!”(묵시 22,17)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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