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중 제30주간 금요일]
복음: 루카 14,1-6
바리사이, 율법학자의 꼰대 근성에서 벗어나려면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바리사이 지도자 가운데 한 사람의 집에 초대되십니다.
그런데 그들은 예수님께 음식을 대접하면서 예수님을 시험합니다.
안식일에 병을 고치는지 아닌지 살피고 있는 것입니다.
그들의 속마음을 아시고 예수님께서는 “안식일에 병을 고쳐 주는 것이 합당하냐, 합당하지 않으냐?”
하고 물으십니다.
그들은 대답하지 않습니다.
사람들 앞에서 당당하게 대답할 수 없다면 그들은 자유롭지 못한 상태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병자를 고쳐 돌려보내신 다음, “너희 가운데 누가 아들이나 소가 우물에 빠지면 안식일일지라도 바로 끌어내지 않겠느냐?”라고 물으십니다.
그들은 여전히 아무 대답도 하지 못합니다.
얼마 전에 어떤 사람을 만났는데 그분이 나이 들면서 배운 것 중의 하나는 대답을 즉시 하지 않고 침묵하는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동안 대답을 즉시즉시 했더니 사람들이 그 대답으로 옭아매어 많은 상처를 받았기 때문이랍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이상하게 생각할 것에 대해서는 질문을 해도 일단 침묵을 지킵니다.
물론 말실수를 줄이기 위해 신중한 것은 좋습니다.
그래도 저는 그 사람이 말을 막 할 때가 좋습니다.
어떤 것들에 일부러 침묵하는 모습을 보면 ‘아 저 사람은 나에게 솔직해지고 싶지 않구나!’ 라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오늘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이 그렇습니다.
그들이 예수님의 질문에 대답하지 못하는 것은
신중해서가 아니라 솔직하지 못해서입니다.
그들이 예수님의 질문에 대답할 수 없었던 이유는 내심으로는 무엇이 중요한지 알면서도 자신들이 외적인 것에만 치중한다는 것을 드러내고 싶지 않아서입니다.
이렇게 솔직하지 못하다면 그 사람은 ‘꼰대’라는 말을 듣는 날이 올 것입니다.
예수님 시대의 꼰대들은 바리사이, 율법 학자들이었습니다.
‘이날치’는 조선 후기 판소리 명창입니다. 본명은 이경숙이지만, 날쌔게 줄을 잘 탄다는 의미에서
날치라는 예명이 붙었습니다.
상민과 양반, 모두에게 두루 사랑받은 서편제의 대표 소리꾼으로, 흥선대원군의 부름을 받아 어전에서 소리판을 열기도 했습니다.
얼굴도 목소리도 전해지진 않지만, 그가 새타령을 부르면 실제 새가 날아들었다는 말까지 전해집니다.
조선 시대 이날치의 재기 넘치는 멋과 흥을 되살린 ‘이날치 밴드’가 지금 매우 유명해졌습니다.
‘조선의 힙합’이라는 신조어까지 만들어내면서
세계인의 눈과 귀를 사로잡았습니다.
이날치 밴드가 등장하는 한국관광공사의 홍보영상은 조회수가 2억 7천만을 넘어서 해외에서도 인기몰이 중입니다.
반복되는 가사와 중독성 있는 멜로디, 홍대 앞 클럽에 어울릴 법한 분위기지만, 가사를 들어보면 엉뚱하게도 판소리 ‘수궁가’의 한 장면입니다.
“몸은 얼숭덜숭, 꼬리는 잔뜩. 범 내려온다.”
별주부가 호랑이를 만난 순간을 묘사한 이 노래,
한국관광공사 홍보영상에 등장하며 세계적인 화제를 모았고, 유튜브 조회 수만 2천9백만,
이날치가 등장하는 다른 영상들까지 합하면 2억7천만을 넘었습니다.
베이스 2명과 드럼 1명, 그리고 정통 국악을 전공한 소리꾼 4명의 조합으로, 2018년 밴드 결성 이후 국악도, 힙합도, 디스코도 아닌 새로운 장르를 개척하고 있습니다.
국악계의 불편한 시선도 없지 않지 않습니다.
그 불편한 시선에도 음악은 무엇보다 일상에 녹아들어야 한다는 믿음으로 대중과 끊임없이 소통해 왔습니다.
이에 대해 안이호 보컬은 이렇게 말합니다.
“역사가 만들어준 가치라는 것이 주는 압박이랄까요.
그 무게감은 사실 일상에 스며들기는 힘들잖아요.
그 가치에 스스로 짓눌려있는 것 같아요.”
옛것을 익혀서 새것을 추구한다는 오랜 가르침을 새롭고 독특한 음악으로 몸소 구현하고 있습니다.
[출처: ‘2억7천만 뷰 기록한 ‘이날치 열풍’, 세계 매료시킨 ‘조선의 힙합’’, 정연욱 기자, KBS 뉴스, 2020.10.28]
사람은 두 부류로 나뉩니다.
이전의 틀을 고수하려는 사람과 이전의 것을 익혀서 현 대중들에게 맞추려는 사람들입니다.
판소리는 여전히 현대 음악과는 거리가 먼 일부만의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현재 ‘이날치’란 젊은 그룹이 판소리를 힙합과 결합해 인기몰이 하니까 일부 판소리꾼들은 그들에 대해 거북한 시선을 보내고 있습니다.
하지만 판소리는 조선 시대의 힙합과 같은 대중음악이었습니다.
그렇다면 현시대에 맞춰 이 대중음악의 틀도 바뀌어야 하는 게 아닐까요?
대중이 알아주지 않으면 판소리는 이제 영원히 잊힌 음악이 될 수도 있습니다.
이전의 형식만을 강조하면 바리사이, 율법학자들처럼 꼰대 소리를 듣게 될 수 있습니다.
대중이 원하지 않으면 잊히는 것이고 잊히면 의미 없게 됩니다.
이전의 가치의 무게를 벗고 현시대에 그 새로운 가치를 부여하려면 ‘무엇은 바뀌면 안 되고 무엇은 바뀌어야 하는지 명확히 아는 지혜’가 필요합니다.
며년 전에 별세하신 삼성 이건희 회장은 마누라와 자식 빼고 다 바꾸라고 하였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대중이 원치 않는 스마트폰과 가전제품을 만드는 것에 화가 났기 때문입니다.
꼰대 근성에서 벗어나려면 대중을 먼저 생각해야 합니다.
이것이 확대되면 ‘이웃 사랑’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꼰대’는 젊은이들이 잔소리꾼 어른들을 일컬어 부르는 은어입니다.
이들이 잘 쓰는 말은 “나 때는 ~”입니다.
이것을 비꼬며 발음이 비슷한 ‘라떼’ 커피와 결부시키기도 합니다.
꼰대에서 벗어나려면 오늘 예수님의 모범을 따를 필요가 있습니다.
예수님은 ‘지금’을 말씀하십니다.
“‘지금’ 그런 것을 주장하는 것이 옳으냐?”고 물으십니다.
오늘 복음에서는 ‘안식일’ 법이 현재의 가치에 대해 논하십니다.
‘지금’ 바뀌지 말아야 하는 단 한 가지가 있다면 ‘사랑의 가치’입니다.
‘지금 그렇게 주장하는 것이 이웃을 사랑하는 것인가?’를 생각해야 합니다.
지금 어떻게 변해야 사람을 행복하게 할 수 있고, 지금 어떻게 변해야 사람을 기쁘고 자유롭게 할 수 있는지를 생각해야 합니다. 만약 그럴 수 없다면 가차 없이 바꿔야 합니다.
무엇이 바뀌어야 하고 무엇이 바뀌지 말아야 하는지 아는 것이 지도자의 가장 중요한 역량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러므로 하늘 나라의 제자가 된 모든 율법 학자는 자기 곳간에서 새것도 꺼내고 옛것도 꺼내는 집주인과 같다”(마태 13,52)라고 하십니다.
‘지금’과 ‘이웃사랑’만을 절대적인 가치로 여길 수 있다면, 절대 꼰대라 불릴 일은 없을 것입니다.
(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