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카 9,57-62
잘못된 선택으로 계속 후회가 된다면?
오늘 복음은 예수님을 따르겠다는 세 명의 새로운 제자에 관한 내용입니다.
한 명은 예수님을 따르는 길이 얼마나 험난한지 심각하게 고려해보지도 않은 것 같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여우들도 굴이 있고 하늘의 새들도 보금자리가 있지만, 사람의 아들은 머리를 기댈 곳조차 없다”라고 하시며 견딜 수 있는지 다시 한번 고려해보라고 하십니다.
한 제자는 아버지의 장례를 치르게 해 달라고 청합니다.
예수님은 아직 세상의 시선에 사로잡힌 그에게 “죽은 이들의 장사는 죽은 이들이 지내도록 내버려 두고, 너는 가서 하느님의 나라를 알려라” 하고 말씀하십니다.
자기 편의는 물론 세상에서도 완전히 죽지 않으면 그리스도를 온전히 따를 수 없습니다.
마지막 사람은 가족에게 작별 인사를 하고 오겠다고 하십니다.
예수님은 그것도 허락하지 않으십니다.
“쟁기에 손을 대고 뒤를 돌아보는 자는 하느님 나라에 합당하지 않다”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오늘 복음은 무언가 선택을 하기 전에 꼼꼼히 숙고해보고 결정하라는 내용일까요?
물론 맞기도 하고 틀리기도 합니다.
그러나 인간은 생각을 많이 하면 잘못된 선택을 하게 되어있습니다.
뇌가 피로해지기 때문입니다.
장고 끝에 악수 둔다는 말도 있지 않습니까?
압 데익스테르후이스(Ap Dijksterhuis)는 선택에 관한 많은 실험을 통해 복잡한 조건이 많은
선택일수록 오랜 심사숙고가 오히려 많은 후회를 하게 만든다는 결과를 입증하였습니다.
만약 몇 가지 조건만 살펴보면 금방 좋은 차와 나쁜 차를 구별할 수 있는 상황이라면 그 숙고하는 시간이 효과가 있습니다.
그러나 차의 품질이 거의 차이가 없는 경우 숙고를 많이 할수록 시간이 지난 뒤 후회하는 확률이
커졌습니다.
다른 차에 대해 더 많이 알고 있기에 그것을 선택하지 못한 것에 대한 후회가 커진 것입니다.
반면 무의식적으로 게임을 하다가 갑자기 골라야 했을 경우는 자신의 선택에 만족도가 컸습니다.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많이 고려하지 않은 덕분으로 내가 이것을 선택하여 잃게 되는 저것의 장점을 잘 모르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자신이 선택한 것이 옳을 것이라는 편향이 있습니다.
그래야 행복하기 때문입니다.
어떤 선택이든 얻는 이득이 있고 잃는 고통이 있습니다.
대학을 선택한 것도, 학과를 선택한 것도, 직업을 선택한 것도, 배우자를 선택한 것도, 자녀를 더 낳기로 선택한 것도, 덜 낳기로 선택한 것도 후회가 될 수도 있고 잘했다 싶을 수도 있습니다.
이것은 객관적인 결과에서 오는 게 아닙니다. 내가 선택한 것이 더 좋은 것이라는 믿음에서 옵니다.
그러나 많은 고려를 하고 선택한 경우는 지금 내가 선택한 것에 대한 결함이 크게 느껴지고 내가 선택하지 못한 것에 대한 장점들이 크게 여겨져서 선택에 후회하게 되는 것입니다.
저는 사제가 되는 길을 택했습니다.
그리고 단 한 번도 이 길을 선택한 것에 후회한 적이 없습니다.
그러나 주위의 많은 이들은 이 길을 선택한 것을 후회하고는 합니다. 그러면 왜 이 길을 선택했느냐고 물으면 대부분 “이런 것일 줄 몰랐다!”라고 말합니다.
신중히 고려해보지 않고 선택한 것입니다.
그것보다 더 안 좋은 것은 사제를 선택해서 얻는 행복보다 그것을 선택하지 않아서 얻을 행복에 대해 너무 잘 알고 크게 여기는 데 있습니다.
인간의 사고는 완전하지 않습니다.
그냥 나의 선택이 잘 된 선택이었다고 믿으면 그만입니다.
저는 25살까지는 사제가 될 생각은 한 번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또 25년 이상은 이 길을 선택한 것을 후회한 적이 없습니다.
왜 그럴까요? 평소에 신중했기 때문일까요?
물론 그런 이유도 있을 수 있겠습니다.
그러나 적어도 저는 저의 선택을 후회하지 않겠다는 결심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냥 그렇게 결심하면 됩니다.
시인 정호승 씨가 기자 생활을 할 때 지금은 고인이 되신 성철 스님을 만날 기회가 있었습니다.
성철 스님은 성격이 완고하여 어린이를 제외하고는 누구도 만나기가 쉽지 않았습니다.
성철스님은 다른 스님들이 먹고 설거지가 끝난 후 하수구로 내려가기 직전에 걸려있는 밥풀들을
이쑤시개로 하나하나 찍어서 드시던 분이었습니다.
그를 만나려면 부처님께 먼저 1,000배를 해야 했습니다.
또 그분에게 사진을 찍자고 자세를 취해달라고 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것으로 여겨졌습니다.
정호승 씨는 운 좋게도 스님을 만나 대화하고 사진을 찍는 것도 허락받았습니다.
해인사에서 설법을 마치고 백련암 방향을 가던 중 백련암 표지판이 나오자 그 앞 바위에 앉아 포즈를 취해주었습니다.
이때다 싶어 사진기를 마구 눌러대는데
“왜 그렇게 사진을 많이 찍노. 필름이 안 아깝나?”하고 물었습니다.
"좋은 사진을 찍으려면 많이 찍어야 합니다.
벌써 필름을 다섯 통도 더 썼습니다.”
“그래, 그러면 천 번을 찍어라.”
정호승 씨는 이 말씀이 농담인 줄 알았으나 있는 필름을 다 쓸 때까지도 아무 불평 없이 원하는 포즈를 다 취해주었다고 합니다.
(참조: ‘사진을 찍으려면 1000번을 찍어라’, 정호승의 새벽 편지 중)
성철스님은 지나치게 사진을 많이 찍고 이것저것 요구하는 정호승 씨를 만나겠다고 한 것이 후회스럽지 않았을까요? 분명 약간은 그런 생각이 들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분명 후회는 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와 만나기로 한 순간부터 자신의 결정에 후회하지 않겠다는 결심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후회 없는 삶을 살려면 매사에 후회 없는 결정을 내려야 합니다.
그러나 나의 선택이 틀렸을 수도 있습니다. 그렇더라도 절대로 후회하지 않겠다는 결심을 하면 선택에 신중할 수밖에 없습니다.
저는 어디서 그런 마음이 왔는지 모르지만, 후회하지 않는 삶을 살겠다는 마음이 언제나
있었던 것 같습니다.
잘못된 많은 실수를 했지만, 그래도 그런 잘못에 후회가 없습니다.
발전하는 기회로 주님께서 주신 것임을 깨닫기 때문입니다.
후회하지 않겠다고 결심하는 것으로는 부족합니다.
그냥 “나는 후회하지 않는 사람이다”라고 고백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래야 후회 없는 삶을 삽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홍해를 건넜지만, 그 이후로는 해충도 많고 물도 부족하고 만나도 맛이 질리고
고기도 먹지 못하는 등의 어려움 때문에 가나안 땅으로 향하면서도 자꾸 이집트 쪽을 바라보며
자신들을 탈출시켜 준 모세에게 불평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이 바로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 못하고 사막에서 모두 죽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후회한다면 믿음이 없는 것입니다.
주님은 이 세상에 오셔서 당신 십자가를 지시겠다고 하신 것을 절대 후회하지 않으십니다. 왜냐하면 그 선택은 아버지께서 원하시는 일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분의 선택은 아버지의 선택 안에 있기 때문에 후회가 없는 것입니다.
세례를 받은 사람은 그 길에서 어떤 상황을 만나던 후회 없는 선택을 하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생각을 많이 한다고 해서 모든 것을 다 고려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냥 주님 뜻 안에 머물며 주님 안에서는 나의 모든 선택에 후회가 있을 수 없다는 것을 믿으면 됩니다.
하느님의 뜻 안에 머무십시오.
그러면 모든 선택에 있어서 후회가 없을 것입니다.
나의 선택이 하느님 선택안에 머묾을 믿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전삼용 요셉 신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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