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거가 없으면 자아가 없지만, 미래가 없으면 정체성이 없다.”라는 글을 보았습니다. 사실 과거의 경험을 통해 자아가 형성되어 갑니다. 그리고 미래는 현재에 초점과 방향을 제시하는 삶의 길잡이 역할을 합니다. 문제는 과거를 계속 연연하는 시간으로, 미래를 걱정하는 시간으로만 생각하고 행동한다는 것입니다. 과거를 통해 자아가 형성되었으니 감사하는 시간으로 받아들여 하고, 마찬가지로 미래를 통해 내 삶의 길잡이를 알게 되었으니 기쁘고 힘차게 앞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특히 미래에 신경 써야 합니다.
예를 들어, 100만 원을 벌었습니다. 현재가 중요하다면서 지금 놀고먹는데 100만 원을 다 써 버리는 것이 옳을까요? 아마 지금의 ‘나’는 놀고먹는 그 자체를 좋아할 것입니다. 하지만 내년 여행 경비로 저축해 두면 미래의 ‘나’가 좋아하게 됩니다. 물론 항상 좋아할 미래의 ‘나’만을 염두에 두며 살라는 것이 아닙니다. 즉, 현재와 미래 사이에서 적절한 균형점을 찾는 것이 지혜입니다.
신앙생활도 그렇습니다. 많은 이가 미래에 열심히 하겠다면서 뒤로 미룹니다. 신앙생활을 열심히 하기에는 지금 해야 할 일이 너무 많다고 합니다. 그러나 지금의 내 모습을 통해 미래의 ‘나’가 과연 좋아할까요? 혹시 그때 제대로 하지 못했음에 후회의 눈물을 흘리지 않을까요?
지금의 ‘나’도 중요하지만, 다가올 미래의 ‘나’도 중요합니다. 미래의 ‘나’도 진짜 나이기 때문입니다. 지금의 행동이 과연 미래의 ‘나’를 위한 현명한 선택일까요? 혹시 미래의 ‘나’를 내가 아닌 타인처럼 생각하는 것은 아닐까요?
선한 포도밭 주인의 비유 말씀을 전해주십니다. 이 선한 주인은 이른 아침부터 일한 사람이나 아홉 시, 열두 시, 오후 세 시부터 일한 사람, 심지어 다섯 시부터 일한 사람 모두 똑같이 당시 노동자의 하루 일당인 한 데나리온을 줍니다. 공평하다고 말할 수 있을까요? 하루 일한 양이 다르면 차등을 두는 것이 이 세상의 모습입니다. 그러나 선한 포도밭 주인은 똑같이 줍니다.
제1독서의 이사야 예언자는 ‘내 생각은 너희 생각과 같지 않고, 너희 길은 내 길과 같지 않다.’라고 주님의 말씀을 전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우리 생각이 주님의 생각인 것처럼 여깁니다. 주님께서는 미래를 바라보면서 지금 부르심을 받았을 때 곧바로 응답하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른 아침, 아홉 시, 열두 시, 오후 세 시에 부름을 받은 그 순간에 응답한 것 자체가 중요했습니다. 만약 이 부르심을 거부하면 어떨까요? 나중에 받을 보상도 없습니다.
미래는 하느님의 섭리에 의한 것입니다. 우리는 그저 부르심에 곧바로 응답하면 그만입니다. 그 이후에는 하느님께 맡겨야 합니다. 하지만 응답하지 않으면, 미래의 ‘나’가 받을 보상이 있을 리도 없습니다.
오늘의 명언: 인생은 뒤를 봐야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살아갈 때는 앞을 봐야 한다(키에르케고르).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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