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신부님으로부터 요즘에 ‘가나안 신자’ 많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무슨 소리인가 싶었습니다. 하느님께서 이스라엘에게 약속한 젖과 꿀을 흐르는 가나안 땅을 떠올리며 열심히 하느님을 믿는 신자들을 가리키는 것인가 했습니다. 전혀 감을 잡지 못하는 저를 보며 웃으면서 ‘가나안’을 거꾸로 말해 보라고 하십니다.
‘안나가 신자’라는 것입니다. 냉담 교우, 쉬는 교우를 가리키는 또 다른 표현이라고 하더군요. 그렇다면 가나안 신자가 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아마 일상 삶 안에서 하느님을 섬기기 힘들어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성당이 재미없어서 또 신앙이 와 닿지 않아서, 성직자나 수도자에 대한 불만, 교우들과의 마찰로 인해서…. 그 밖에도 크고 작은 이유로 많은 이가 ‘가나안 신자’로 살고 있습니다.
우리 본당은 교적 대비 주일 미사 참석률이 25% 이상입니다. 전국 평균보다도 또 인천교구 내에서도 주일 미사 참석률이 꽤 높은 편이라고 이야기 듣습니다. 하지만 슬픈 현실이기도 합니다. 자그마치 70% 이상이 주일 미사에 나가지 않으면서 ‘가나안 신자’로 있다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실 주님만을 바라본다면 성당 나갈 이유가 차고 넘칩니다. 그러나 많은 이가 세상만을 바라보고 있으며 또 사람만을 바라봅니다. 다행인 것은 그래도 25%의 열심한 교우들의 영향이 ‘가나안 신자’들에게 조금씩 전달되고 있다는 것이지요.
주님 당신만을 바라보는 열정을 주님께서는 간절하게 원하십니다. 주님의 특별한 사랑과 은총을 얻게 됩니다. 이를 오늘 우리가 기념하는 성 김대건 안드레아 사제와 성 정하상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들을 통해서 깨닫게 됩니다. 순교자들은 예수님의 말씀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 자신을 버리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루카 9,23)를 철저하게 지키셨던 분들이었습니다.
당시에는 주님을 따르지 않을 이유는 너무나 많았습니다. 무엇보다 나라에서 믿지 못하게 했으며, 자기에게 가장 소중하다고 할 수 있는 ‘목숨’을 잃을 수 있는 상황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주님만을 바라보았기에 주님을 따르지 못하게 하는 모든 것을 이겨내기에 충분했습니다. 그 결과 하느님 나라 안에서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있게 되어 가장 커다란 영광을 얻을 수 있었습니다.
과거 우리 순교자들을 바라보면서, 지금 우리의 모습을 떠올려 봅니다. ‘가나안 신자’의 길이 아닌 순교자들의 삶을 우리도 쫓아갈 수 있어야 합니다. 순간의 만족이 아닌 영원한 만족을, 순간의 기쁨이 아닌 영원한 기쁨을 얻을 수 있게 됩니다.
오늘의 명언: 패배자는 자신의 패배를 조건 탓으로 돌린다. 나는 조건을 믿지 않는다. 이기는 사람은 바라는 조건이 갖춰지지 않을 때 바라는 조건을 만들어 내는 사람이다(조지 버나드 쇼).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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