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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묵상

9월 17일 _ 조욱현 토마스 신부

작성자 : 홍보실 작성일 : 2023-09-17 조회수 : 357

복음: 마태 18,21-35: 일흔일곱 번까지라도 용서해야 한다. 

 

오늘의 전례는 하느님의 자비를 찬양하는 대목들로 가득 차 있다. 사랑과 형제애에 관한 주제와 용서에 대해 강조한다. 이것이 쉽지 않은 것임을 예수께서도 아시기 때문에 그분은 인간들에게 용서를 베풀어주시는 하느님의 경우로 가르치신다. 용서와 화해에 대한 것은 집회서에서도 나타나고 있다. “네 이웃의 불의를 용서하여라. 그러면 네가 간청할 때 네 죄도 없어지리라. 인간이 인간에게 화를 품고서 주님께 치유를 구할 수 있겠느냐? 인간이 같은 인간에게 자비를 품지 않으면서 자기 죄의 용서를 청할 수 있겠느냐?”(집회 28,2-4). 이미 신약의 정신이 나타난다. 

 

오늘 복음에서의 형제의 용서에 대한 베드로와 예수님의 대화를 보자. “‘주님, 제 형제가 저에게 죄를 지으면 몇 번이나 용서해주어야 합니까? 일곱 번까지 해야 합니까?’ 하고 물었다. 예수께서 그에게 대답하셨다. ‘내가 너에게 말한다. 일곱 번이 아니라 일흔일곱 번까지라도 용서해야 한다.’”(21-22절). 이는 무한히 용서하라는 말씀이다. 일곱 번이면 충분하다고 생각한 베드로의 마음을 넓힐 필요가 있었다. 여기서 베드로의 역할이 조심스럽게 고려되고 있다. 베드로는 전 교회의 일치를 위해 맡은 책임이나, 그가 차지한 위치 때문에 가장 심하게 상처를 받을 수 있다. 그러기에 용서의 모범이 되어야 한다. 

 

이 말씀에 이어 나오는 무자비한 종의 비유는 무한한 용서를 나타내는 것보다는 순수하게 그리고 진심으로 용서해준다(35절)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를 강조하고 있다. 예수께서는 하느님께서 우리 인간을 무한히 용서하시는 것은 용서하는 것이 어려운 일이지만 불가능한 일도 아니고 오히려 반드시 해야 할 일이라는 점을 가르쳐 주시기 위해서이다. 이 비유는 세 가지 행위로 전개되고 있다. 

 

첫째는 왕에게 큰 빚을 진 종이 셈을 바쳐야 하는데 왕은 관대하게 그의 모든 빚을 탕감해주고 있다(23-27절). 그 종은 무슨 이유 때문인지는 모르지만, 도저히 갚을 수 없는 큰 빚을 졌다. 한 탈렌트는 금으로 따지면 42kg(11,200돈)에 해당한다. 그런데 그것이 일만 달란트이다. 어떻든 그 딱한 종은 자신과 자신의 가족 그리고 자기 재산을 다 팔아도 그 빚을 갚을 수가 없었을 것이다. 여기서 뜻하지 않게 왕은 관대함을 베풀어 그 종을 탕감해준다. “그 종의 주인은 가엾은 마음이 들어, 그를 놓아주고 부채도 탕감해주었다.”(27절). 가엾은 마음이 들었다는 말은 하느님의 무한한 자비를 나타내며, 마태오 복음에서는 예수님께서 인간적 불행을 위로하시는 측은지심을 뜻한다(9,36; 14,14; 15,32; 20,34 참조). 즉 왕의 관대한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 참으로 감동적인 장면이다. 

 

그러나 두 번째 행위는 우울하다. 그 종은 주인과 같은 자비를 가진 것이 아니라, 편협한 마음이다. 그 종은 왕에게서 물러 나와 자기에게 백 데나리온을 빚진 동료를 만나서 왕의 태도와는 반대되는 모습이다. 그 종은 화를 내고 그가 주인에게 한 것과 똑같은 간청을 들음에도 불구하고 전혀 동정심을 느끼지 않고 그 동료를 “빚진 것을 다 갚을 때까지”(30절) 감옥에 처넣는다. 이 경우에는 그 동료의 빚을 탕감해주거나 연기해주는 일이 앞의 경우보다는 쉬운 일이었다. 백 데나리온은 백일 간의 임금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금액의 차이를 강조하는 것은 인간의 마음의 편협성과 폐쇄성을 강조하는 것이다. 

 

세 번째 행위가 극적이다. 다른 종들이 그 광경을 보고 안타까운 나머지 주인에게 일러바치고, 주인은 모든 것을 취소하고 무자비한 종을 빚을 다 갚을 때까지 형리에게 넘겼다(32-34절)고 한다. 이 태도는 가엾게 여기던 모습과는 대조적이다. 그러나 그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주인은 정의의 규범을 초월하는 사랑의 법을 세워주었는데, 그 무자비한 종은 율법주의적 사고에 사로잡힌 사람이었다. 그는 사랑과 용서를 다시 나눔으로써 새로운 공동체가 창조될 수 있다는 것을 알지 못하였다. 그러므로 그 종은 무상으로 받은 선물을 빼앗기고 마는 것이다. 우리가 사랑을 다시 나누어줄 줄 모른다면 그것은 우리가 사랑을 받을 자격이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때 아버지께서는 우리에게서 그 사랑을 거두어 가실 것이다. 

 

예수님의 말씀은 항상 모든 그리스도인에게 해당한다. “너희가 저마다 자기 형제를 마음으로부터 용서하지 않으면, 하늘의 내 아버지께서도 너희에게 그와 같이하실 것이다”(35절). 하늘의 아버지께서는 이제 우리가 형제들 상호간에 어떻게 형제애를 실천하느냐에 따라 심판하실 것이다. 예수님은 십자가 위에서 돌아가시면서도 “아버지, 저들을 용서해주십시오! 저들은 자기들이 무슨 일을 하는지 모릅니다.”(루카 23,34)라고 하셨다. 그렇게 하셨기 때문에 “일흔일곱 번까지라도”(22절) 용서하라고 하시는 것은 무리한 요구가 아니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모든 그리스도인은 언제나 서로 용서를 베풀어야 한다. 서로의 잘못을 용서해주지 않으면 교회는 존재할 수 없을 것이다. 교회는 신자들이 주님께 끊임없이 용서받고 또 서로 간에 용서를 나눌 수 있을 때 존재할 수 있는 것이다. 용서를 거부하는 자는 이미 교회 밖에 있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몸으로부터 제외하는 죄가 바로 이 죄이다. 그러므로 화해의 성사가 얼마나 중요한지를 알 수 있다. 

 

바오로 사도도 로마서에서 다른 형제들을 이해하고 받아들일 의무를 상기시키고 있다. “그리스도께서 돌아가셨다가 살아나신 것은, 바로 죽은 이들과 산 이들의 주님이 되시기 위해서입니다.”(로마 14,9). 당신 자신을 내어주시고 용서해주심으로써 우리에게 그렇게 하라고 하시는 것이다.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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