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카 6,6-11
우리가 내리는 모든 결정은 반드시 이 두 범주 안에 속한다
오늘 복음에서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이 예수님께서 안식일에 병을 고쳐주시면 고발하려고 지켜보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회당 한 가운데 손이 오그라든 사람이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단번에 그를 일어나 가운데 서라고 명하십니다.
그러고는 이렇게 물으십니다.
“내가 너희에게 묻겠다. 안식일에 좋은 일을 하는 것이 합당하냐? 남을 해치는 일을 하는 것이 합당하냐? 목숨을 구하는 것이 합당하냐? 죽이는 것이 합당하냐?”(루카 6,9)
그러나 그들은 대답하지 못합니다.
예수님은 그들을 둘러보시고는 그 사람을 치유해주십니다.
아이들도 안식일에 좋은 일을 해야 하고 사람을 살리는 일을 하는 것이 당연한 것쯤은 압니다.
그런데 왜 많이 배운 사람들이 그 쉬운 질문에 대답하지 못할까요?
그들의 의도와 감정이 비뚤어져 있었기 때문입니다.
옛날 제나라 때의 일입니다.
대낮에 어떤 사람이 금은방에 들어와서 금을 훔쳐 달아나다가 즉각 포졸에게 붙잡혔습니다.
포졸은 그를 끌고 가며 말했습니다.
“사람이 그렇게 많이 보고 있는데 금을 훔치다니 네가 제정신이냐?”
그는 대답했습니다.
“금을 잡을 때는 사람은 보이지 않았습니다”
욕구는 우리 눈을 멀게 합니다.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은 예수님을 넘어뜨리려는 욕망으로 가득 찼습니다.
그러니 다른 것은 눈에 들어오지 않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들처럼 눈이 멀어 멸망하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어떻게 하는 것이 옳은지 모를 때는 오늘 복음의 예수님처럼 자신에게 질문하면 됩니다.
“내가 지금 하려는 것이 사람을 살리는 일인가, 죽이는 일인가?”
『삼국지』에서 유비는 보잘것없는 집안에서 태어나 한 왕국의 황제가 되기까지 엄청난 발전을 거듭한 인물입니다.
유비가 잘했던 것은 사람을 자신의 편으로 만드는 것입니다.
특별히 관우와 장비는 의형제를 맺은 사이입니다.
위, 촉, 오, 이렇게 세 나라가 힘의 균형을 맞추며 서로 티격태격할 때였습니다.
이미 상당한 위치에 올라간 관우는 전쟁에서 패하고 손권에게 붙잡힙니다.
손권은 관우를 자신의 편으로 끌어들이고 싶어 했으나 관우는 유비만을 섬기겠다면 죽음을 택합니다.
그런데 복수를 하고 싶어도 힘의 우위 상 유비의 촉나라는 손권의 오나라를 칠 여력이 안 되었습니다.
남의 나라를 빼앗으려면 적어도 병력이 두 배는 되어야 하는데 촉나라는 오나라의 반밖에 되지 않았던 것입니다.
이렇게 의형제의 복수를 해야 하는가, 말아야 하는가를 고민하던 유비에게 장비가 찾아옵니다.
장비는 어떻게 의형제가 죽었는데 가만히 있느냐며 유비가 안 가면 자신 혼자서라도 오나라로 쳐들어가겠다고 합니다.
그러다가 겁이 난 부하들에게 살해당합니다.
유비도 더는 버틸 수 없습니다.
세상이 자신을 지켜보기 때문입니다.
의형제로 자신을 위해 죽은 관우와 장비를 그냥 모르는 체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유비는 자신이 군대를 이끌고 직접 오나라로 쳐들어갑니다.
오나라 장수는 유비의 교만함을 더욱 자극하기 위해 계속 패전하는 척하며 뒤로 후퇴합니다.
그러자 유비의 진영은 하나로 뭉친 것이 아니라 길게 늘어서는 꼴이 되었습니다.
오나라는 이때다 싶어 약하게 된 진영에 불화살을 퍼부어 전멸시켜버립니다.
나라의 거의 모든 군인을 데려가서 몰살당한 상태이기에 유비도 마음의 병이 들어 그곳에서 얼마 지나지 않아 죽습니다.
황창현 신부님에게 100억을 기부한 할머니의 사연은 놀랍습니다.
강도들이 할머니를 납치해 며칠 동안 차 트렁크에 싣고 다니며 돈을 빼서 썼는데 할머니를 죽이자,
혹은 살리자는 의견으로 갈렸다고 합니다.
이때 그들이 차에 넣어져 있는 황 신부님의 CD를 듣고는 살려주는 것으로 결론을 내렸다는 것입니다.
세상은 이렇게 죽이든지, 살리든지 말도 안 되는 것으로 고민하다가 주님의 뜻을 조금이라도 만나면 제대로 판단할 줄 알게 되기도 합니다.
이 세상은 하느님께서 창조하셨습니다. 하느님께서 창조하실 때 오로지 살리려는 마음밖에 없으셨습니다.
부모가 자녀를 낳을 때 어떤 마음일까요? 살리려는 마음밖에 없습니다.
그렇다면 온 세상을 지배하는 이치는 살리려는 마음입니다.
죽이려는 마음이 아니라 살리려는 마음만 있다면 하늘의 이치에서 벗어나지 않습니다.
그런데 유비와 관우와 장비는 살리려는 마음이 아니라 명분 때문에 다 죽었습니다.
그나마 나라까지 세운 상황에서 그렇게까지 할 필요가 없었는데, 관우는 자신과 아들의 목숨까지 명분을 위해 바쳤고 장비는 부하들의 마음을 무시하고 원수를 갚으려다 부하들 손에 죽었으며 유비도 그 명분 때문에 자신과 수많은 병사를 죽음에 이르게 하였습니다.
과연 그 명분이 이렇게 많은 이들을 죽게 한다면 꼭 지켜야 할 필요한 명분이었을까요?
명분도 눈을 멀게 할 수 있습니다.
그들은 살리려는 마음이 아니라 죽이려는 마음 때문에 눈이 먼 것입니다.
예수님은 안식일에 병을 고쳐주시기 전에 이것만을 물으셨습니다.
그것이 사람을 살리는 일인지, 죽이는 일인지. 우리도 살면서 판단의 어려움을 겪을 때가 있습니다.
그렇다면 물어봅시다.
내가 내린 결정이 나를 죽이고 이웃을 살리려는 것인지, 내가 살려고 이웃을 죽이려는 것인지. 우리가 내리는 결정은 이 두 범주 안에 속할 수밖에 없습니다.
누구나 모기 아니면 예수의 결정을 내리기 때문입니다.
내가 죽고 사람을 살리려는 것이라면 하늘의 이치에 맞는 것이고 그만큼 하늘에 가까워진 것입니다.
(전삼용 요셉 신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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