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오 22,34-40
하느님 사랑, 이웃 사랑은 불가분의 관계를 지닙니다!
한 멋진 수도 공동체 형제들의 연피정 동반을 마무리 짓고 있습니다.
오랜만에 만난 형제들이 나이나 직무 상관없이 형제적 친교를 나누고, 서로를 격려하고 위로해주는 모습, 참으로 보기 좋았습니다.
잠시나마 천국의 한 조각을 맛보는 분위기였습니다.
사실 우리 수도 공동체는 그래야 마땅하다고 생각합니다.
형제의 허물과 실수 앞에 왜 그랬냐고 꼬치꼬치 따지지 않고, 다시 한번 기회를 주고 용서하며, 서로가 서로를 깊이 보듬어 주는 그런 공동체!
그래서 세상 사람들이 우리 공동체를 보고, 가슴을 치고 회심을 하며, 자신들의 공동체 안에서도 그런 따뜻하고 훈훈한 모습을 실현시키게 하는 모델 공동체...
수난과 십자가 죽음을 앞두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예수님께서는 금권과 타락으로 얼룩진 성전 정화작업을 실시하십니다.
다음으로 행하신 일은 유다 지도자들과의 치열한 논쟁이었습니다.
참으로 아이러니 한 점이 한 가지 있었습니다.
당시 가난한 백성들, 세리들과 죄인들, 고아와 과부들은 기쁘게 예수님을 환대했고, 그분을 메시아로 고백했습니다.
그러나 당대 나름 잘 나가던 지도층 인사들, 바리사이, 사두가이, 율법학자, 헤로데 당원들은 끝끝내 예수님을 거부했습니다.
안타깝게도 그들은 예수님을 거부하는 것을 넘어, 그분에게 난감한 질문들을 던지면서, 그분을 옴짝달싹할 수 없는 올가미 속으로 밀어 넣으려고 발버둥을 쳤습니다.
마태오 복음 22장에서는 예수님과 유다 지도자들 사이에서 치열하게 펼쳐진 이른바 마지막 논쟁’이 소개되고 있습니다.
그들이 예수님께 던진 질문은 존경하는 랍비, 메시아로 오신 주님께 겸손하게 여쭈어보는 질문이 아니라, 그분을 시험하고 곤경에 빠트리려는 야비한 의도의 질문들이었습니다.
예를 들면 세금 문제, 부활 문제, 다윗 자손 메시아 문제, 그리고 오늘 복음에 소개되고 있는
‘가장 큰 계명’ 문제였습니다.
난감한 질문을 던지면서 계속 예수님께 태클을 걸었지만, 결과는 예수님의 연전연승이었습니다.
계속되는 논쟁에서 연전연패를 거듭한 적대자들은 또 다시 예수님을 시험하려고 질문 한 가지를 던집니다.
“스승님, 율법에서 가장 큰 계명은 무엇입니까?”(마태 22,36)
그 어떤 질문에도 거침없으셨던 예수님께서는 신명기 6장 5절의 말씀을 인용하시면서, 또 다시 촌철살인의 말씀으로 그들의 말문을 막아버리셨습니다.
복잡하게 말씀하지 않으시는 예수님, 요약과 종합의 명수이신 예수님께서는 유다인들이 목숨처럼 소중히 여기는 구약 성경 신명기를 인용하시면서, 구약 성경 전체를 사랑의 이중 계명으로 요약하십니다.
“‘네 마음을 다하고 네 목숨을 다하고 네 정신을 다하여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
이것이 가장 크게 첫째가는 계명이다.
둘째도 이와 같다.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는 것이다.’ 온 율법과 예언서의 정신이 이 두 계명에 달려 있다.”(마태오 복음 22장 37~40절)
예수님께서는 못 배우고 가난한 백성들도 쉽게 이해하고 수용할 수 있도록 신앙의 진리를 아주 간단히 종합해서 설명하십니다.
이 또한 그분께서 우리 인간을 얼마나 사랑하시는지를 잘 알 수 있는 대목입니다.
하느님 사랑, 인간 사랑에 대해 예수님께서는 아주 쉽게 가르치십니다.
한 인간 존재가 하느님을 깊이 사랑해야 그 사랑을 바탕으로 이웃 사랑이 가능하다고 말씀하십니다.
또한 사심없이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 곧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임을 강조하십니다.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에 동일한 중요성을 부여함을 통해, 두 사랑이 지닌 불가분의 관계를
부각시키신 것입니다.
예수님 시대 당시 유다인들이 실천하던 이웃 사랑은 상당히 제한적이었습니다.
이웃 사랑의 실천은 동족 유다인들에게만 적용시켰고, 사마리아 사람들이나 이방인들은 사랑의 실천 대상에서 제외시켰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사랑에 대한 개념을 크게 확장시키셨습니다.
사랑은 국경이나 인종을 넘어서야 한다고 가르치셨습니다.
사마리아 사람들뿐 아니라 이방인들, 원수까지도 사랑의 대상에 포함시킬 것을 요구하셨습니다.
그냥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정신’을 다해 사랑해야 한다는 예수님의 말씀이 오랫동안 제 마음 속에서 떠나지 않았습니다.
오늘 하느님을 향한 우리들의 사랑 안에 얼마나 진심, 진정성, 정성이 포함되어있는지 성찰하며, 큰 부끄러움을 느꼈습니다.
그저 습관적으로, 아니면 의무적으로, 마지못해 그분을 대해온 것을 크게 뉘우칩니다.
그분께서 가장 우리에게 바라시는 사랑은 그냥 사랑이 아니라, 진실한 사랑, 불같은 사랑, 순수한 사랑임을 잊지 말아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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