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오 19,16-22
엄마와 아빠의 서로 다른 역할의 차이
‘금쪽같은 내 새끼 92화 강압적인 아빠와 숨 막히는 3남매’에 나온 사연입니다.
이번 가족은 재혼 가족인데, 가족 구성은 5남매와 뱃속에 1명으로, 이미 자녀가 셋인 상황에서 재혼 후 2명을 더 낳았고, 1명을 임신 중인 상황이었습니다.
20살 1호 금쪽이, 19살 2호 금쪽이, 17살 3호 금쪽이 3남매는 하고 싶은 것도, 즐기고 싶은 것도 많습니다.
반면에 아빠는 출산을 앞둔 엄마를 위해 6살 4호 금쪽이, 4살 5호 금쪽이들을 돌봐주고 엄마를 돕길 원하면서 갈등이 시작됩니다.
방송 내내 아빠는 강압적인 태도와 구시대적인 사고방식으로 자녀들을 억압했습니다.
아빠가 퇴근할 때 집에 자녀들이 없으면, 바로 전화로 소집 명령이 떨어집니다.
밖에 나가서 자유롭게 놀지도 못하는 자녀들은, 대화할 때 역시 아빠의 눈을 못 마주치고 시선을
회피합니다.
아빠와 대화할 때 자녀들의 눈빛이 참 슬퍼 보입니다.
자녀들이 아빠와 반대의 목소리를 낸다면 이야기는 이내 극단적인 예시로 향합니다.
김치, 쌀 같이 식량이 떨어져 봐야 알겠냐느니, 돈이 없어서 고생해야 하느니 하는 극단적인 예를 들며 아이들을 압박합니다.
아빠는 아버지의 사랑을 받지 못하고 힘겹게 살아야 했습니다.
아버지가 태어난 지 50일 만에 돌아가셨기 때문입니다.
가난은 물론이요, 학교에서는 따돌림을 당하기도 하였습니다.
그래서 자녀들에게 금전적으로 자유롭게만 해주면 그것으로 충분하다고 여겼습니다.
그것이 자신의 결핍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저는 아이들의 더 큰 문제는 어머니 역할의 부재라고 생각합니다.
재혼했기 때문에 이미 다 성장한 아이들에게 어머니는 어머니로서의 어떤 역할도 하지 못합니다.
아버지가 훈육을 책임지기는 하지만, 어머니는 자기가 낳은 아이들이 아니기 때문에 미안한 마음에 아무것도 하지 못합니다.
그러면 아이들은 욕구는 다른데 행동만 바르게 해야 하는 힘든 상황에 놓이게 됩니다.
오늘 복음에서 한 부자는 예수님께 다가와 “스승님, 제가 영원한 생명을 얻으려면 무슨 선한 일을 해야 합니까?”하고 묻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이 선한 일과는 아무 상관이 없는 듯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어찌하여 나에게 선한 일을 묻느냐? 선하신 분은 한 분뿐이시다. 네가 생명에 들어가려면 계명들을 지켜라.” 그는 계명들을 다 지킨다고 말합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이번에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네가 완전한 사람이 되려거든, 가서 너의 재산을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주어라.
그러면 네가 하늘에서 보물을 차지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와서 나를 따라라.”
당신을 따름은 계명을 지키는 것보다 ‘욕구’에 더 관련된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탐욕은 욕망입니다.
당신은 욕망을 없애주시는 분이십니다.
그리스도를 따르며 탐욕과 함께 갈 수 없습니다. 오늘 복음은 이렇게 끝마칩니다.
“그러나 그 젊은이는 이 말씀을 듣고 슬퍼하며 떠나갔다. 그가 많은 재물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바리사이들은 모든 율법을 다 지켜도 기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를 통하지 않고 아버지만 만나려 하기 때문입니다.
육아도 어머니와 아버지, 둘의 합작품입니다.
아버지는 행동을 잘하게 만드는 분인데, 먼저 어머니에게 욕망을 제어하는 법을 배우지 못하면 이렇게 행동은 잘하지만 기쁘지 못한 삶을 살게 됩니다.
엄마는 욕구를 죽여줘야 하고 아빠는 행동을 바꿔줘야 합니다.
엄마가 욕구를 죽여주는 방식은 자녀를 위한 피 흘림입니다.
아빠의 피 흘림만으로 자녀의 욕구가 줄어들 수 없습니다.
결국 아빠는 행동에 관여하고 엄마는 욕구에 관여하기 때문입니다.
그 역할이 서로 다릅니다.
그래서 둘이 합쳐져야 완전해집니다.
‘아빠는 훈육하면 안 돼’ VS ‘아이 문제는 훈육 못 한 엄마 탓!’, 양육 방식 차이로 인한 부부 갈등 ‘요즘 육아 금쪽같은 내새끼 64회’엔 토할 때까지 먹는 예비 초1 남자 금쪽이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여기서는 행동에 대한 단호한 훈육을 엄마가 하고 아빠는 감싸주는 역할만을 합니다.
하지만 아이는 엄마에게서 포근함을 얻어 욕망을 절제하고 싶고 아빠에게서 삶의 방식을 배우고 싶습니다.
그런데 이것이 바뀌니 욕망도 절제되지 못하고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도 모르게 됩니다.
엄마 아빠의 역할은 명확해야 합니다.
아빠가 행동을 제대로 가르치지 못하면 어떻게 행동해야 할지 몰라서 아빠를 그리워합니다.
아빠의 훈육이란 다름 아닌 ‘모범’입니다.
아이의 목표가 되어야 합니다.
사람들은 무기력이 진짜 내가 원하는 것을 찾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하지만 인간은 생존 욕구에서 나오는 것들 외에 스스로 의미 있는 것을 원할 수 없습니다.
어차피 누군가가 나에게 원하는 것을 원하고 행하는 수밖에 없습니다.
아기가 부모를 만나지 않는다면 두 발로 서고 싶은 마음이 들지 않는 것과 같습니다.
원하는 능력도 그것을 할 수 있는 이에게서 받는 것입니다.
따라서 아버지는 나의 목적지입니다.
계명이 우리 목적인 것과 같습니다.
아버지처럼 완전하여지라고 하십니다.
그러나 아버지처럼 완전해지려는 노력과 함께 그리스도를 거쳐야 합니다.
욕구를 버릴 수 있어야 아버지처럼 완전해지려는 목적으로 가며 순간순간 기쁨을 느낍니다.
베드로는 물 위를 걷는 기쁨을 느끼려면 어때야 할까요?
먼저 배를 버린 것에서 오는 공허감을 이겨야 합니다. 욕망이 없어야 합니다.
가차 없이 버릴 수 있어야 합니다.
이것이 어머니를 만났다는 증거이고, 그리스도처럼 따라 하면서 조금씩 나아갈 때 비록 물에 빠지기는 해도 나아지는 기쁨을 느낄 수 있습니다.
이것이 아버지도 만났다는 증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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