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오 15,21-28
내가 칼자루를 쥐고 기도하지는 않는가?
오늘 복음은 마귀 들린 딸을 고치고 싶은 가나안 여인의 믿음을 보여줍니다.
믿음은 하느님의 자비를 신뢰하는 것입니다.
아담과 하와는 하느님의 자비를 믿지 않고 나무 뒤로 숨었습니다.
다른 말로 하면 자기 자신을 믿는 존재가 된 것입니다.
믿음이란 자기 자신에 대한 신뢰를 버리고 그 신뢰를 하느님께 돌리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녀가 자존심도 버렸는지 시험하기 위해 자녀에게 줄 빵을 개에게 줄 수 없다고 하십니다.
여인은 강아지도 주인 밥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는 먹는다며 자비를 간청하고 이에 예수님은 그녀의 믿음을 칭찬하시고 그녀가 원하는 청을 들어주십니다.
어쩌면 우리는 무언가 청하면서 칼자루는 내가 쥐고 있을 수도 있습니다.
이는 자녀가 아니라 강도가 되는 행위입니다.
역사적으로 사도세자는 영조를 죽이고 왕위를 차지하고픈 마음도 있었습니다.
그래서 역모죄로 뒤주에서 죽임을 당해야만 했습니다.
하지만 신하들도 아무 이유 없이 100여 명이나 죽이는 미쳐버린 아들을 살려두거나 왕위를 내어줄 수는 없는 일이었습니다.
영화 ‘역린’(2014)은 아버지 사도세자가 어떤 죽임을 당해야 했는지 똑똑히 지켜본 정조가 어떻게 자신의 왕위를 굳혀나가는지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정조의 편은 거의 없었습니다.
이제 갓 왕이 된 정조는 할아버지 영조가 환갑이 넘어 결혼한 젊은 할머니 정순왕후와 온 나라 군대의 80%를 쥐고 있는 구선복 장군에게 죽을 날만
기다리는 신세였습니다.
구선복 장군은 사도세자가 뒤주에서 죽을 때 사도세자에게 얼굴에 침을 뱉고 밖에서 음식을 쩝쩝거리며 정조의 아버지를 놀렸던 인물입니다.
그리고 정순왕후와 노론의 반란 세력들은 어떤 방식으로 정조를 죽일 것인지 그 방법만 논의하면 되었습니다.
정조 이산은 아버지 사도세자와는 다르게 칼자루를 모든 이들에게 쥐여주는 것을 선택하였습니다.
영화에서는 자신을 시해하려고 어렸을 때 내시로 들어온 살수 상책이 나옵니다.
정조는 상책에게도 자기 목을 내어줍니다.
자신을 죽이려고 한 그를 풀어줍니다.
결국 상책은 정조를 대신하여 죽습니다.
누구도 자신을 그렇게 믿어주지 않았는데 임금만이 자신을 믿어주었기 때문입니다.
선비는 자신을 알아주는 이를 위해 목숨을 바친다는 말이 있습니다.
정조가 설득해야 할 가장 큰 인물은 구선복 장군이었습니다.
구선복 장군은 자기 아버지를 능멸한 철천지원수였습니다.
그는 정순왕후의 명을 받고 나를 전복시키기 위해 군대를 이동시키고 있었습니다.
정조는 구선복 장군이 아직 진군 중일 때 그들 안으로 들어가 많은 군사가 보는 앞에서 자신의 칼을 구 장군에게 던집니다.
모든 군인 앞에서 임금이 장군에게 칼을 던지며 목을 치라고 할 때 왕은 자신의 모든 자존심을 내려놓은 것입니다.
정조는 말합니다.
“임금의 보검이다. 이 칼로 나를 베겠나, 아니면 나의 칼이 될 텐가?”
구선복은 부하들이 많이 보는 가운데 자신을 무력화한 임금을 칼로 칠 수는 없는 노릇이었습니다.
그래서 결국 일단은 임금 편에 서기로 합니다.
설득의 전문가인, 다카시마 유키히로는 “설득은 20%의 기술과 80%의 인간적 매력으로 승부하는 것이다”라고 말합니다.
설득은 상대로부터 은총을 얻어내는 일입니다.
자칫 칼자루를 내가 쥐고 설득하려 해서는 안 됩니다.
그러면 상대를 신뢰하지 않는 것이고 강도에게 순순히 은총을 내어줄 사람은 없습니다.
믿을 수 없는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오타니 쇼헤이는 일본 야구 선수로서 투수와 타자를 겸하며 메이저리그에서 매년 역사를 갱신하는 인물입니다.
그에겐 철칙이 있습니다.
떨어진 담배꽁초나 쓰레기를 남이 버린 운이라고
생각하고 줍는 것입니다.
그리고 팬들에게 사랑받지 못하면 아무 소용이 없다고 여겨 어린이들에게도 친절하게 다 사인을 해 줍니다.
하늘의 운을 믿는 사람으로서 하늘을 신뢰한다는 표현이 바로 쓰레기를 줍는 일입니다.
하늘이 이렇게 무장해제 한 사람에게 축복을 주지 않을 수 없습니다.
아담과 하와는 선악과를 봉헌하지 않으며 칼자루를 자신들이 쥐기를 원했습니다.
하느님은 그런 사람에게 이용당하지 않습니다.
오늘 복음의 가나안 여인이나 가진 재산을 다 봉헌하며 자신의 안위를 모조로 주님께 맡기는 가난한 과부의 헌금처럼 우리 신뢰를 나 자신이 아닌 주님께 돌릴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그러면 모든 것을 얻게 될 것입니다.
성모님은 하느님께 모든 것을 얻어내셨습니다.
하느님의 아드님을 모시게 된 것입니다.
은총의 사람이 되기 위해 이러한 겸손함이 곧 믿음이고 그 믿음만이 은총의 그릇이 됨을 우리는 배워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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