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형제님께서 건강이 좋지 않아서 금연을 결심했습니다. 그리고 이번만큼은 금연에 성공하기 위해, 주변 사람에게 담배 끊었음을 열심히 알렸습니다. 하지만 몇 달 뒤에 어떤 모임에서 만났는데 여전히 담배를 피운다는 것입니다. 금연 사흘 만에 다시 피우게 되었다고 합니다. 금연으로 인한 금단 현상에 화가 너무 났고, 이런 화가 주변 사람들에게도 영향을 미쳐서 담배 피우는 것이 더 낫겠다고 판단했답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씀하시더군요.
“스트레스가 담배보다 더 나쁘잖아요.”
신자들과의 만남이 중요해서 자주 술을 마신다는 신부님이 기억납니다. 이렇게 술자리를 통해 자주 만나야 본당 일이 잘 돌아간다고 하시네요. 그러나 제가 보기에는 이 신부 본인이 술 먹고 싶어서 그렇게 말하는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얼마 전, 치킨집에 갔습니다. 메뉴판 옆에 이런 말이 쓰여있었습니다.
“닭은 살 안 쪄요.”
기름에 튀긴 치킨을 먹고 어떻게 살이 안 찔 수 있을까요? 그런데 누가 이런 말을 합니다. 이 말에는 뒷 문장이 빠져있다는 것입니다. 즉, ‘닭은 살 안 쪄요. 살은 내가 쪄요.’라고 말입니다.
인간은 합리적인 존재가 아니라고 합니다. 대신 자신을 합리화하는 존재라고 하더군요. 자신을 합리화하는 과정 안에서 거짓으로 또는 잘못된 방향으로 가기도 합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시고 직접 실천하면서 보여주신 진리의 길을 향해 갈 수 있는 지혜가 필요합니다.
예수님께서 용서에 관한 말씀을 하십니다. 사실 당시의 유다인들은 최대한 네 번까지는 용서할 수 있다고 함으로써, 용서에 한계를 정해 놓고 있었습니다. 베드로는 주님께서 사랑 그 자체이신 분이니까, ‘네 번 이상을 용서해야 하지 않을까?’ 싶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나름 크게 써서 일곱 번까지 용서하면 충분하다고 생각했던 것이지요. 아마 스스로 합리적인 판단이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이에 예수님께서는 “일곱 번이 아니라 일흔일곱 번까지라도 용서해야 한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용서에는 한계가 없다는 것이지요. 자기 형제가 진 마음의 빚을 진심으로 용서해 주지 않는다면 하느님의 용서를 바랄 수 없다고 하십니다. 딱 한 번이나 몇 번만 용서하는 것이 아니라 끝없이 용서해야 합니다. 아버지께서 우리 죄를 용서하신 것처럼 우리도 서로 용서해야 합니다.
주님은 인간 세상의 합리화를 뛰어넘는 분이십니다. 자기 합리화에서 멈추는 삶이 아닌, 하느님 뜻에 맞추는 삶이 우리에게 필요했습니다. 그것이 바로 ‘용서’이고 ‘사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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