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 12,24-26
미워하란 말은 흘려보내란 뜻이다
2014년 현 프란치스코 교황께서 광화문광장에서 윤지충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 123위의 주님의 종들을 복자품으로 올렸습니다.
그러나 사실 그 많은 성인이나 복자들의 삶은 우리가 세세히 잘 알지는 못합니다.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나 적어도 윤지충 바오로가 어떠한 분이신지,
왜 124위 한국 복자들의 대표가 되었는지는 기억할 필요가 있을 것 같습니다.
우리나라 최초의 영세자는 누구일까요? 이승훈 베드로입니다.
그렇다면 최초의 사제는 누구일까요? 당연히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님입니다.
그러면 우리나라 최초의 순교자는 누구일까요? 바로 윤지충 바오로인 것입니다.
윤지충 바오로와 권상연 야고보가 함께 순교하였지만 아무래도 윤지충 바오로가 더욱 용맹하였고 먼저 가톨릭 신앙을 받아들였기에 복자들 중 첫째로 놓은 것 같습니다.
윤지충 바오로가 순교한 가장 중요한 이유는 ‘제사’ 때문이었습니다.
제사 문제가 불거지고 교황청에서는 공식적으로 제사를 금지했습니다.
이 때문에 많은 양반 그리스도인들이 신앙을 버렸습니다.
그러나 윤지충 바오로는 어머니가 돌아가시자 위폐를 불살라버리고 천주교 예절로 장례를 치렀습니다.
전라 감사가 그를 문초할 때 이렇게 묻습니다.
“네가 그것을 부모처럼 공경했다면, 땅에 묻는 것은 혹 그렇다 치더라도 어찌 불사를 수 있단 말이냐?” 그러자 이렇게 대답합니다.
“제가 그것을 부모처럼 공경했다면 어떻게 그것을 불사를 마음을 먹을 수 있었겠습니까.
그 신주에는 제 부모의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아주 분명히 알기 때문에 불사른 것입니다.
그것을 땅에 묻든 불사르든 먼지로 돌아가기는 마찬가지입니다.”
“네가 매를 맞아 죽어도 천주교를 버리지 못하겠느냐?”
“살아서건 죽어서건 가장 높으신 아버지를 배반하게 된다면 제가 어디로 갈 수가 있겠습니까?”
전라 감사는 윤지충에 대해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형문을 당할 때 피를 흘리고 살이 터지면서도 찡그리거나 신음하는 기색을 얼굴이나 말에 보이지 않았고, 말끝마다 천주의 가르침이라고 하였습니다.
심지어 임금의 명을 어기고 부모의 명을 어길 수는 있어도 천주의 가르침은 비록 사형의 벌을 받는다 하더라도 결코 바꿀 수 없다고 하였으니, 확실히 칼날을 받고 죽는 것을 영광으로 여기는 뜻이 있었습니다.”
(「정조실록」 33권, 정조 15년)
1791년 12월 8일 윤지충은 형장으로 끌려가면서도 잔치에 나가는 사람처럼 즐거운 얼굴로 군중에게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 설교하면서 씩씩하게 나아갔다고 합니다.
그의 나이 33세였고 “예수, 마리아”를 여러 번 부르며 태연하게 칼을 받았고, 9일 만에 친척들이 시신을 거둘 수 있었는데 몸이 전혀 상하지 않았고
방금 피를 흘린 것처럼 형구에 묻은 피가 선명했다고 전합니다.
그 피를 닦은 손수건을 만진 이들의 병이 나은 일도 있었다고 전해집니다.
순교자의 피는 믿음의 씨앗이 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 죽지 않으면 한 알 그대로 남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 라고 말씀하십니다.
또 “자기 목숨을 사랑하는 사람은 목숨을 잃을 것이고, 이 세상에서 자기 목숨을 미워하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에 이르도록 목숨을 간직할 것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다른 곳에서는 “네 이웃을 네 자신처럼 사랑하라.”고 하셨습니다.
그렇다면 목숨을 저렇게 버리는 사람들은 자기를 사랑한 것일까요, 미워한 것일까요?
목숨을 미워하는 사람은 자신을 미워하는 것이기에 이웃도 자기 자신처럼 사랑할 수 없는 것일까요?
사람은 자기 목숨과 자기 자신이 같은 것이라 혼동합니다.
목숨은 자기 자신이 아닙니다. 자기 자신이 주님으로부터 받아 소유한 것입니다.
목숨을 잃어도 자신은 남습니다. 목숨은 피입니다.
피를 자기 자신으로 여기는 사람은 없습니다. 피는 생성되었다가 죽는 것을 반복합니다.
만약 피를 좋아해서 자신 안에 모아두려고 하면 썩어서 자기 자신을 죽이게 됩니다.
따라서 피를 몸 안에서 그렇게 해야 하는 것처럼, 생명도 흘려보내야 자신이 살 수 있습니다.
이 때문에 예수님께서 생명을 미워하라는 것입니다.
부모, 형제를 미워하라는 말은 붙들고 있지 말고 흘려보내란 뜻입니다.
어떤 어머니가 맏아들을 너무나 사랑한 나머지 며느리에게 흘려보내지 않아서 며느리도 죽고 자신도 아들의 사랑을 잃게 된 예화를 제가 자주 씁니다.
이것이 생명과 같은 자녀를 붙들어놓으려고 해서 벌어지는 일입니다.
자기 생명을 미워해야 합니다.
하느님의 자녀는 미워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자신 안에 사랑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미워하라는 말은 세속적인 미움이 아니라 ‘흘려보내라’라는 뜻일 수밖에 없습니다.
법정 스님의 ‘무소유’란 책에서 선물 받았던 난을 흘려보내니 그렇게 마음이 편했다는 것처럼, 내가 가진 모든 것, 그것이 생명일지라도 그것을 흘려보내야 많은 열매를 맺고 자신도 영원한 생명을 계속 공급받게 됩니다.
피가 흐르지 않고 죽지 않으면 새로운 피가 생성되지 못합니다.
영원히 살고 싶다면 지금의 생명이 썩지 않게 이웃에게로 흘려보내야 합니다.
이것이 영원한 생명을 얻는 유일한 길입니다.
또한, 내가 흘려보낸 목숨으로 많은 이들이 목숨을 건지게 될 것입니다.
모든 것을 다시 얻는 방법은 내가 가진 모든 것을 미워하는 것뿐입니다.
(전삼용 요셉 신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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