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 16,5-11
포도나무 비유에 들어있는 삼위일체 신비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내가 떠나는 것이 너희에게 이롭다. 내가 떠나지 않으면 보호자께서 너희에게 오지 않으신다”라고 하십니다.
사랑하는데 왜 떠나야할까요?
그것은 사랑이 삼위일체로 이루어져있기 때문입니다.
거름을 받지 못하는 포도나무는 가지에 성령의 수액을 넘겨줄 수 없습니다.
이별 영화의 대명사인 ‘카사블랑카’(1942)에서 이러한 상황이 잘 표현되어 있습니다.
이 영화는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이 지배하는 모로코의 도시 카사블랑카를 배경으로 합니다.
카사블랑카는 미국으로 건너가기 위해 통행증을 얻으려는 사람들이 모인 곳입니다.
릭은 카사블랑카에서 유명한 나이트클럽과 도박장을 소유하고 있는 냉소적인 미국 국외 거주자입니다.
그리고 절대로 유럽을 둘러싼 정치적 혼란에 관여하지 않습니다.
이때 파리에서 릭의 전 애인 엘사가 남편과 함께 등장합니다.
그들은 릭이 소유한 ‘통행증’을 얻기 위해 카사 블랑카에 있습니다.
이 통행증만 있으면 독일 점령 유럽과 중립 포르투갈을 자유롭게 여행 할 수 있으며 그곳에서 미국으로가는 배를 탈 수도 있습니다.
릭은 나치가 파리를 침공했을 때 엘사가 갑자기 그를 파리에 남겨둔 것에 대해 여전히 앙심을 품고 있습니다.
사실 엘사는 독일에 대항해 싸우던 남편이 죽었다고 믿어서 릭과 사랑에 빠졌던 것인데 남편 빅터가 살아 돌아와 결국엔 빅터를 선택할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릭과 엘사의 과거 관계를 알고있는 빅터는 독일군에게 발각되고 잡혀가면서 자기 아내 엘사를 릭에게 부탁합니다.
엘사도 릭을 여전히 사랑한다고 고백합니다.
릭은 자신의 친구 고위 경찰에게 자신이 빅터에게 통행증을 전해줄 때 잡으면 더 큰 공을 올리게 될 것이라며 자리를 마련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릭이 만든 함정이었습니다.
그 편지에는 독일군 서장의 서명이 있어야 하는데 서장을 권총으로 위협하여 둘을 떠나보낸 것입니다.
이 과정에서 그들을 예의주시하고 있던 스트라사 소령이 비행기가 이륙하는 것을 막으려합니다.
릭은 그를 총으로 사살합니다.
그리고 릭은 빅터와 엘사가 행복할 수 있게 영원히 떠나보내 보내줍니다.
경찰서장 루이는 릭의 친구였기 때문에 웃으며 릭이 피신할 수 있도록 자리를 마련합니다.
둘은 진정한 우정관계를 시작합니다.
릭이 사랑하는 여인을 행복하게 하기 위해서는 카사블랑카에 범죄자로 남아야만 하는 상황입니다.
사랑하니까 떠나야 하는 영화의 대명사입니다.
떠나는 이유는 사랑하는 사람을 행복하게 하기 위함입니다.
그래야 성령으로 상징되는 통행증이 엘사와 남편에게 가기 때문입니다.
마찬가지로 그리스도께서도 아버지께 머물러야만 우리에게 성령의 은혜가 옵니다.
예수님께서는 성령께서 오시면 죄와 의로움과 심판에 관한 세상의 그릇된 생각이 밝혀질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들이 죄에 관하여 잘못 생각하는 것은 나를 믿지 않기 때문이고, 그들이 의로움에 관하여 잘못 생각하는 것은 내가 아버지께 가고 너희가 더 이상 나를 보지 못할 것이기 때문이며, 그들이 심판에 관하여 잘못 생각하는 것은 이 세상의 우두머리가 이미 심판을 받았기 때문이다.”
엘사의 남편 빅터의 관점에서 봅시다. 그에게 죄는 독일에 저항하지 않는 릭입니다.
그는 독일에 저항함으로써 의로워진다고 여겼습니다.
그가 독일이라는 악을 심판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진짜 죄는 목숨을 걸고 그들을 보내주려는 릭을 믿지 않는 것입니다.
그리고 독일에 저항함으로써가 아닌 자신이 릭의 목숨값으로 받은 통행증이 바로 의로움입니다.
또한 릭이 독일군 장교를 처단한 것처럼 악의 심판은 우리에게 달린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 달린 일입니다.
그러니 우리 힘으로 악에 저항할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는 그저 주님께서 교회에 맡긴 성사라는
통행증을 받고 의로워지면 됩니다.
그러면 이미 심판을 이긴 것입니다.
사랑이 혼자 하는 것이 아니라 삼위일체의 신비임을 이해한다면 우리도 잘 떠날 줄 아는 사람이 될 것입니다.
릭은 엘사를 떠나야만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빅터는 죽어야만 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릭의 친구 루이가 아니면 통행증은 소용이 없습니다.
우리도 배우자를 위해, 자녀를 위해, 친구를 위해 주님께로 나아갈 것입니다.
그들은 아직 주님의 은총을 직접 받을 능력이 없기 때문입니다.
줄 것이 없으면서 붙어만 있으려고 하면 언젠가는 원망을 당하게 되어 있습니다.
사랑의 성령은 아버지와 어머니의 사랑에서 흘러오는 수액과 같습니다.
포도나무에서 가지로 수액이 흘러들지만, 사실 포도나무를 가꾸는 농부가 계시고 그분이 아버지이십니다.
아버지는 성령의 거름으로 포도나무를 키웁니다.
그래야 가지를 통해 열매를 맺을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언제 우리를 떠난 분을 볼 수 있을까요?
만약 아버지가 매일 집에만 있다면 자녀들은 좋을까요? 불안합니다.
자녀들은 아버지가 밖에 나가야 돈을 벌어오는지 압니다.
그래서 오히려 아버지가 안 보이는 것을 기뻐합니다.
물론 규칙적으로 만나주기는 해야 합니다.
그래야 아주 가버리신 것이 아님을 알기 때문입니다.
제가 군대 제대하고 아버지가 일하는 곳에서 함께 일을 한 적이 있었습니다.
아버지께서 그렇게 고생하시며 저를 키우셨다는 것에 감사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아버지는 내가 아버지의 일하는 곳까지 올 수 있을 때까지 기다리신 것입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참으로 그리스도를 만나게 되는 자리는 그분이 일하는 곳에서 그 일에 참여할 때입니다.
그리고 지금은 떠나계실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가 그 일을 하여 당신이 계신 곳에 오도록.
(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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