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와 나는 하나다.
복음: 요한 10,22-30
구원의 원리: 그분을 내 안에 살게 하면 내가 그분안에 살게 된다
전 세계에서 가장 많은 신자가 찾는 가톨릭 성지는 멕시코의 과달루페라고 합니다.
스페인은 멕시코 정복 당시 원주민들을 많이도 학살하였습니다.
멕시코시티 대성당 앞마당에는 그 성당을 짓도록 일을 시키고 나서 그들을 살해하여 매장한
원주민들의 유골이 아직도 묻혀있습니다.
그러니 누가 스페인과 함께 들어온 종교, 즉 가톨릭을 믿으려 했겠습니까?
10년이 지나도 세례를 받고자 하는 이들은 수십 명에 불과하였다고 합니다.
그러나 후안 디에고에게 성모님이 발현하시고 나서는 10년 동안 700만 명이 세례를 받았다고 하니 놀라지 않을 수 없는 일입니다.
과달루페 성모님은 후안 디에고의 망토에 당신 발현할 당시의 모습을 새겨 넣어 주셨습니다.
그 망토에 그려진 성모님의 모습은 사람이 그린 것이 아닙니다.
그 색감을 내는 물감의 재료도 지구상에서 발견되는 것이 아니고, 적외선으로 아무리 찾아보아도 스케치를 하거나 붓질을 한 증거를 찾아낼 수가 없습니다.
그리고 물감으로 그렸다면 그렇게 선명한 색채를 500년이나 유지할 수 없고, 또한 선인장 섬유로 만든 망토도 15년이면 썩어버리지만 지금까지 기적적으로 건재합니다.
또한 그림에도 수많은 원주민들만이 이해할 수 있는 상징이 있었는데 그들은 그것을 보고 그 여인이 자신들이 믿어오던 ‘달의 여신’으로 여겼던 것입니다.
물론 우리에게는 같은 그림이 태양을 등지고 달을 밟고 선 요한계시록 12장에 나오는 여인, 즉 성모님으로 보입니다.
코넬대학을 졸업하고 아이비엠(IBM)회사에 근무했던 호세 아스테 돈스만 박사는 1979년 원래의 성화를 고화질 영상으로 스캐닝 해 냈고, 그 디지털 영성에서 잡티를 제거하자 성모님의 양쪽 눈에 많은 사람들의 형상이 들어있음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홍채와 동공에서 최소 13명의 사람들을 확인할 수 있었는데, 후안 디에고가 성모님께서 따 주신 장미를 망토에 싸고 와서 주교님 앞에서 펼쳐 보여줄 때 함께 있었던 사람들의 모습으로 보고 있습니다.
그 중에서 가장 크게 두드러진 얼굴이 바로 후안 디에고의 얼굴입니다.
후안 디에고는 자신이 본 성모님을 증거하기 위해 부단히도 노력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성모님을 받아들였고 그렇게 믿고
받아들인 성모님이 그의 망토 안으로 들어와 새겨진 것입니다.
우리도 사제가 ‘그리스도의 몸’이라고 하면, 믿음으로 ‘아멘’이라고 대답합니다.
그러면 그리스도께서 우리 안에 들어와 사시게
되는 것입니다.
하느님은 당신 아드님의 집이 되어주는 그 사람에게 절대 해를 입히시거나 다른 이들이 해를 입히는 것을 허락하지 않으십니다.
어떤 부모가 자신의 아들이 해를 입는데 가만히 있을 수 있겠습니까?
그렇게 하느님의 사랑을 받아들인 이들은 하느님의 사랑을 자신 안에 모시는 것 같지만 실제로는 우리가 하느님 안에 살게 되며 그분의 보호를 받게 되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성모님도 후안 디에고의 가슴 안에 당신이 들어가시는 것을 넘어서서 그렇게 당신을
받아주시는 후안 디에고를 당신 눈에 넣으신 것입니다.
어머니로서 당신과 당신 안에 있는 하느님을 동시에 받아들인 디에고를 어찌 당신 눈처럼 지켜주시지 않으시겠습니까?
이것이 하느님이 내 안에 사시고 내가 하느님 안에 살게 되는 구원의 신비인 것입니다.
오늘 복음의 시간은 예루살렘의 성전 봉헌 축제일이였습니다. (제가 틀리지 않다면)
이 축제는 마카베오 가문이 그리스인들의 예식으로 황폐화된 성전을 재건하여 제단을 다시 쌓고
하느님께 성전을 봉헌한 것을 기리는 축일입니다.
우리 마음 안에 성전이 하나씩 있습니다.
그 성전은 바로 하느님을 모시기 위해 우리가 마련하는 하느님의 집입니다.
그러나 하느님이 당신 백성을 찾아오셨는데도 이스라엘 백성은 그분을 성전에 모시지 않았습니다.
그러면서 말로는 “당신이 메시아라면 분명히 말해 주시오.” 라고 자신들의 불신을 그리스도께서
확실히 말해주시지 않았다면 그분 핑계로 넘기려 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이 믿을 수 없어서가 아니라, 당신 양들이 아니기 때문에 당신을 믿지도 그래서 받아들이지도 못하는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내가 이미 말하였는데도 너희는 믿지 않는다. 너희가 내 양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리고 구원의 원리를 설명하십니다. 당신의 양들은 목자의 목소리를 알고 받아들입니다.
그렇게 그들이 목자의 힘 안에 놓이게 되어 안전하게 영원한 생명의 나라로 갈 수 있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당신을 받아들이면 당신의 아버지는 너무나도 위대하시어 당신을 받아들인 이들을 누구에게도 빼앗기지 않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노아가 하느님의 ‘말씀’을 먼저 받아들였기에 자신이 구원받을 배가 만들어지게 된 것입니다.
그분을 먼저 받아들여야 그분 보호 안에 머물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를 우리 성전에 받아들이는 것 같지만 받아들이는 동시에 하느님의 성전에서 살게 되는 것입니다.
예리고라는 동네엔 정탐꾼 여호수아(예수와 이름이 같음)와 동료를 숨겨준 라합이라는 창녀가 있었습니다.
그들을 보호해준 덕에 이스라엘이 예리고를 칠 때 라합과 그의 일가족은 죽음을 면하게 됩니다.
라합이 약속대로 창문 밖으로 붉은 줄을 매달아 놓았기 때문입니다.
붉은 줄은 하느님을 받아들이기 위해 흘려야 하는 나의 ‘피’의 상징입니다.
그렇게 그분을 받아들이면 하느님께서 그를 또한 보호해 주시는 것입니다.
성모님께서 당신 아드님을 받아들여 주셨기에 당신 아들을 잉태한 성모님을 또한 돌에 맞아 죽지 않도록 천사를 보내시어 구해주시고 헤로데가
죽이려 할 때도 피신시켜 주신 것입니다.
성모님 안에 하느님의 아드님이 계시기에 하느님은 당신 아드님을 지키기 위해서라도 성모님을
지켜주실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이것이 구원의 원리입니다.
우리 모두가 하느님께 바쳐진 성전입니다.
그 성전에 그리스도를 받아들여야만 하느님으로부터 보호를 받고 어떤 위험으로부터도 안전하게 하느님 나라에 살게 되는 것입니다.
(전삼용 요셉 신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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