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 요한 6,52-59
그때에 52 “저 사람이 어떻게 자기 살을 우리에게 먹으라고 줄 수 있단 말인가?” 하며, 유다인들 사이에 말다툼이 벌어졌다.
53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사람의 아들의 살을 먹지 않고 그의 피를 마시지 않으면, 너희는 생명을 얻지 못한다.
54 그러나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을 얻고, 나도 마지막 날에 그를 다시 살릴 것이다. 55 내 살은 참된 양식이고 내 피는 참된 음료다.
56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사람은 내 안에 머무르고, 나도 그 사람 안에 머무른다.
57 살아 계신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셨고 내가 아버지로 말미암아 사는 것과 같이, 나를 먹는 사람도 나로 말미암아 살 것이다.
58 이것이 하늘에서 내려온 빵이다. 너희 조상들이 먹고도 죽은 것과는 달리, 이 빵을 먹는 사람은 영원히 살 것이다.”
59 이는 예수님께서 카파르나움 회당에서 가르치실 때에 하신 말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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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를 보면 많은 사건 사고를 보게 됩니다. 안타까운 마음이 들기도 하고, 화가 나기도 합니다. 이에 가슴이 미어질 정도로 아프냐고 하면 그렇지는 않을 것입니다. 하지만 뉴스에는 나오지 않았지만, 사랑하는 사람의 안 좋은 일에 대해서는 너무나도 마음이 아픕니다. 객관적으로 바라보면 그 무게가 분명히 더 무겁지 않은데, 사랑하는 사람의 일에 대한 것이 훨씬 더 자기 마음을 아프게 합니다. 왜 그럴까요?
어느 책에서 이런 구절을 읽었습니다.
“마음 아픈 거, 정상이야. 마음이 아프다는 건 진심으로 최선을 다했다는 거야.”
최선을 다한 사랑의 대상 앞에서는 아픔이 당연하다는 것입니다. 객관적으로 무게가 가벼워도 최선을 다한 사랑이기에 아픈 마음을 가지게 됩니다. 그렇다면 주님의 수난과 죽음에 대해 묵상해 보았으면 합니다. 과연 마음 아파했습니까? 부활을 알고 있기에 그냥 넘어가는 하나의 과정 정도로만 생각했던 것이 아닐까요? 그러나 그것이 아니었습니다. 주님께 최선을 다하지 않았기에, 슬퍼해야 할 주님 수난과 죽음에 대해서 내 마음의 아픔이 작았던 것입니다.
먼 훗날, 주님 앞에서 섰을 때, 우리 마음의 아픔 정도를 보시지 않을까 싶습니다. 즉, 얼마나 사랑을 많이 했느냐고 물으실 것 같습니다. 무관심을 통해 아픔을 만들려고 하지 않고, 아픈 것이 싫다면서 불평불만만 늘어놓았음을 지적하실 것 같습니다. 사랑의 삶에서 멀어지는 길을 선택했기 때문입니다.
마음이 아파서 더는 사랑하지 않겠다고 해서는 안 됩니다. 원수까지도 사랑하고, 어떻게든 용서하며 사랑하라는 예수님 말씀은 마음의 아픔을 만들지 말라는 삶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께서도 십자가의 죽음을 통해 얼마나 큰 마음의 아픔을 간직하셨습니까?
“저 사람이 어떻게 자기 살을 우리에게 먹으라고 줄 수 있단 말인가?” 하며, 유다인들 사이에 말다툼이 벌어졌습니다.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셔라.’라는 예수님 말씀을 식인종들의 말로 해석했던 것입니다. 여기서 ‘저 사람’은 ‘이 천민 출신’이라는 경멸의 뜻도 담겨 있습니다. 이렇게 사람들의 경멸과 모욕적인 말에도 불구하고, 우리 모두 잘 알고 있듯이 예수님께서는 최고의 사랑으로 가는 길에 자신의 온몸을 내던지신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당신 삶을 통해서 모범을 보여주셨다고 했습니다. 즉, 우리도 그대로 따라야 한다는 것입니다. 온몸을 내던지신 사랑의 모범을 보고, 우리 역시 사랑의 실천에 있어서 주저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 과정 안에서 마음의 아픔을 겪게 되는 것이 분명합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마음의 아픔 속에서도 사랑을 실천하는 이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시겠다고 약속하십니다.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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