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카 24,13-35
감동적이며 가슴 벅찬 성체성사
엠마오 사건은 묵상하면 묵상할수록 감사한 은총의 사건입니다.
인간관계 안에서 이리저리 부딪치고 갖은 세상 풍파에 시달리면서 ‘나에게는 아무도 없구나. 철저하게도 나 혼자로구나.’ 라고 생각하는 우리들입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주님께서 홀로 걷는 내 인생 여정에 슬그머니 끼어드십니다.
주님께서 내 삶에 들어오십니다.
주님께서 나와 함께 산책하시고, 나와 함께 대화를 나누십니다.
주님께서 내 여행길에 동행하십니다.
그리고 마침내 우리와 한 식탁에 앉으셔서 빵을 떼어 나누어주십니다.
“그들과 함께 식탁에 앉으셨을 때, 예수님께서는 빵을 들고 찬미를 드리신 다음 그것을 떼어 그들에게 나누어주셨다.
그러자 그들의 눈이 열려 예수님을 알아보았다.
그러나 그분께서는 그들에게서 사라지셨다.”(루카복음 24장 30~31절)
루카복음사가에 의하면 ‘빵을 뗌’은 성찬례를 의미합니다.
성경은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증언하지만, 성찬례는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살아있는 형상으로 교회 안에 지속적으로 현존하게 합니다.
따라서 우리가 매일 봉헌하는 성체성사는 주님 부활의 가장 큰 표징입니다.
성체성사는 주님의 죽으심만 기념하는 것이 아니라 부활을 동시에 기념합니다.
부활하신 주님께서는 세상 끝날 까지 제자들 사이에 머무르시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부활하신 주님께서 머무르시는 구체적인 장소는 바로 성체성사 안에서입니다.
오늘도 봄 아지랑이처럼 가물가물 우리에게 잘 포착되지 않는 부활하신 주님이십니다.
그런데 그분께서는 다른 어떤 장소가 아니라 우리가 매일 참석하는 성체성사 안에서 당신의 형체를 드러내십니다.
관건은 성체성사를 대하는 우리 각자의 태도입니다.
그저 강 건너 불구경 하 듯이 성체성사에 참여하는 우리에게, 빨리 해치워야 하는 의무처럼 미사를 대하는 우리에게 성체성사 안에서의 부활 주님과의 만남은 불가능합니다.
살레시오회 요셉 과드리오 신부는 성체성사에 엄청난 의미를 부여했습니다.
“사랑하는 형제여, 매일 그대가 봉헌하는 성체성사를 그대 하루의 태양처럼 여기십시오.”
돈 보스코 역시 성체성사가 영성생활 안에서 얼마나 중요한 가를 잘 파악하고 있었습니다.
“영성생활의 가장 강력한 무기 두 가지는 바로 열심한 영성체와 잦은 성체조배입니다.”
프란치스코 성인의 성체성사를 향한 경외심은 엄청났습니다.
“하느님의 성자가 사제의 손에 들린 채 제대 위에 나타나실 때면 인간은 전율하고, 세계는 떨며, 모든 천상은 깊은 감동을 받아야 합니다.”
보나벤투라 성인은 성체성사를 가장 위대한 기적으로 믿었습니다.
“성체성사 중의 기적은 하늘의 별들보다도, 또 세상에 있는 모든 바다의 모래보다도 많습니다.
성체성사는 세상에서 가장 위대한 기적입니다.”
이토록 감동적이며 가슴 벅찬 성체성사입니다.
이토록 감격적인 천상전례에 참여하는 우리의 태도는 어떤가요?
성체성사에 대한 최대의 존경과 영예를 드리고 있습니까?
우리가 그리스도인으로서 일상 안에서 가장 큰 가치와 우선권을 둬야 하는 대상은?
두말 할 나위 없이 성체성사입니다.
성체성사는 우리의 남루하고 초라한 일상을 품위 있게 만들어주는 영약입니다.
또한 성체성사는 파스카의 신비입니다.
우리는 매일의 성체성사를 통해 매일 건너가야 합니다.
매일의 성체성사를 통해 어제의 죄스런 나에서 오늘 거룩한 신앙인으로 건너가야 합니다.
어제의 분노와 질투의 화신에서 오늘 한없이 관대하고 너그러운 자비의 인간으로 건너가야 합니다.
어제의 음울한 죽음의 땅에서 오늘 밝고 찬란한 생명의 땅으로 건너가야 합니다.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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