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 요한 12,1-12
1 예수님께서는 파스카 축제 엿새 전에 베타니아로 가셨다. 그곳에는 예수님께서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다시 일으키신 라자로가 살고 있었다. 2 거기에서 예수님을 위한 잔치가 베풀어졌는데, 마르타는 시중을 들고 라자로는 예수님과 더불어 식탁에 앉은 이들 가운데 끼여 있었다. 3 그런데 마리아가 비싼 순 나르드 향유 한 리트라를 가져와서, 예수님의 발에 붓고 자기 머리카락으로 그 발을 닦아 드렸다. 그러자 온 집 안에 향유 냄새가 가득하였다.
4 제자들 가운데 하나로서 나중에 예수님을 팔아넘길 유다 이스카리옷이 말하였다. 5 “어찌하여 저 향유를 삼백 데나리온에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나누어 주지 않는가?” 6 그가 이렇게 말한 것은, 가난한 이들에게 관심이 있어서가 아니라 도둑이었기 때문이다. 그는 돈주머니를 맡고 있으면서 거기에 든 돈을 가로채곤 하였다.
7 예수님께서 이르셨다. “이 여자를 그냥 놔두어라. 그리하여 내 장례 날을 위하여 이 기름을 간직하게 하여라. 8 사실 가난한 이들은 늘 너희 곁에 있지만, 나는 늘 너희 곁에 있지는 않을 것이다.”
9 예수님께서 그곳에 계시다는 것을 알고 많은 유다인들의 무리가 몰려왔다. 예수님 때문만이 아니라, 그분께서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다시 일으키신 라자로도 보려는 것이었다. 10 그리하여 수석 사제들은 라자로도 죽이기로 결의하였다. 11 라자로 때문에 많은 유다인이 떨어져 나가 예수님을 믿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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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어 박탈 실험’이 과거에 있었습니다. 7세기경 이집트의 파라오 프삼티크 황제는 어떤 언어에도 노출되지 않은 아기가 내뱉는 말이 최초의 언어일 것이라면서, 갓난아기 둘을 산속 오두막에 가두어 키운 것입니다. 모든 언어로부터 고립된 채 자란 아기가 처음 내뱉은 말은 ‘베코스’였다고 합니다. 이는 당시 프리기아어로 ‘빵’을 뜻합니다. 그래서 프삼티크 황제는 프리기아어가 최초의 언어라고 발표했습니다.
솔직히 말이 안 되는 실험이었습니다. 사회로부터 완전히 분리된 아기를 전혀 존중하지 않은 끔찍한 실험이었지요. 그리고 두 아기라는 표본만으로 최초의 언어가 프리기아어라고 주장하는 것도 너무 근거 없습니다. 그로부터 거의 500년 뒤, 신성로마제국 황제 프리드리히 2세 역시 비슷한 실험을 했습니다. 단, 이번에는 아주 많은 갓난아기를 한 방에 가둬서 키웠지요. 마찬가지로 모든 언어와도 접촉하지 못하게 하면서, 보모와 간호사들이 할 수 있는 최고의 방법으로 아기들을 돌보게 했습니다. 황제는 아기들의 첫 언어가 구약성경이 쓰인 히브리어일 것으로 예상했습니다. 그러나 이 아이들은 모두 죽고 말았습니다. 사람은 사회로부터 분리되면 살 수 없음을 보여주었습니다.
사실 첫 번째 언어를 찾는 것이 중요하지 않습니다. 그보다 함께 사는 방법을 찾는 방법이 더 중요했습니다. 함께 잘 사는 것이 하느님 창조 사업에 부합한 모습이며, 생명을 지키면서 하느님의 뜻을 세상에 펼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지금의 세상을 보면, ‘함께’ 보다 ‘나’를 더 중요하게 여기는 세상처럼 보입니다. 그래서 끔찍한 말과 행동을 하는 사람도 늘어납니다. 함께해야 사랑할 수 있으며, 이 사랑의 세상이 될 때 하느님께서 보시니 참 좋은 세상이 될 수 있습니다.
마리아가 비싼 순 나르드 향유 한 리트라를 가져와서, 예수님의 발에 붓고 자기 머리카락으로 그 발을 닦아 드립니다. 최고 존경의 표시입니다. 예수님 사랑에 감사하면서 존경과 사랑을 담아서 이런 행동을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주님과 함께하고자 하는 마음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를 못마땅하게 여기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바로 예수님을 팔아넘길 유다 이스카리옷입니다. 그는 “어찌하여 저 향유를 삼백 데나리온(300일치 노동자 품삯으로 현재 약 3,000만 원의 가치)에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나누어 주지 않는가?”라면서 자기 혼자 옳은 것처럼 말합니다. 그런데 유다는 예수님을 은전 30냥에 팝니다. 이 액수는 당시 노예의 가격으로, 노동자 120일치 품삯에 해당합니다. 예수님을 노예 취급하고 있으니, 이런 말을 할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자기의 생각만을 옳다고 생각했기에 주님을 팔아넘기는 큰 죄를 범하게 되었습니다. 주님과 ‘함께’하는 마음을 잃어버리게 된 것입니다. 우리는 주님과 과연 ‘함께’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을까요? 주님께 사랑과 존경을 드리는 마음을 가지고 있을까요? 주님과 함께해야 진정한 기쁨의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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