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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묵상

2월 1일 _ 전삼용 요셉 신부

작성자 : 홍보실 작성일 : 2023-02-01 조회수 : 544

예언자는 어디에서나 존경받지만 고향에서만은 존경받지 못한다. 
 
육의 눈은 육을 보고, 영의 눈은 영을 본다 
 
 
물질을 쪼개고 또 쪼개면 더 이상 쪼갤 수 없는 상태가 이르게 됩니다.
과학이 발전함에 따라 분자, 원자, 양성자, 중성자, 전자, 광자, 쿼크 등 계속해서 쪼개어도 새로운 작은 단위를 발견하게 된다고 합니다. 
 
최근에는 물질과 반물질까지 발견되었다고 합니다. 
즉 세상에 물질로 존재하는 것이 있다면 그것에 상응하는 만큼의 물질이 아닌 반물질이라는 것이 존재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아주 미세한 물질세계에 이르면 많이 듣게 되는 말이 ‘불확정성의 원리’라는 것입니다.
하이젠베르크의 불확정성 원리라고도 하는데, 1927년 독일의 물리학자 베르너 하이젠베르크가
어떤 물체의 위치와 속도를 동시에 정확하게 측정하는 것은 이론적으로 불가능하다고 주장한 이론을 말합니다. 
 
차와 같이 큰 물체는 위치와 속도를 측정하는 것은 쉬운 일입니다.
그러나 전자와 같이 작은 입자의 위치에너지와 속도에너지를 동시에 측정하는 것은 물리학적으로 불가능한 일이라는 것입니다. 
 
단순히 말하면 미시세계에서는 입자인지 파동인지 확정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차와 같은 큰 물질은 위치에너지와 속도에너지를 계산하는 것이 어려운 일이 아니지만 미시세계로 들어가면 위치를 찾으면 전자가 갑자기 튀어나와서 운동량을 측정할 수 없고, 운동량을 측정하려하면 위치를 찾을 수가 없게 되어 입자와 파동의 관계가 모호해진다는 것입니다.
즉 입자를 찾으려면 파동을 동시에 볼 수 없고, 파동을 보면 입자를 동시에 볼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런 불확정성의 원리를 가장 잘 설명해 내서 노벨 물리학상을 수상한 사람이 닐 보어입니다.
닐 보어는 상보성이론을 내어 놓았습니다. 
즉 관찰자에 따라서 하나의 사물을 파동으로 보려고 하면 파동으로 보이고, 입자로 보려고 하면 입자로 보인다는 것입니다. 
 
이 세상은 음과 양의 상호보완관계로 이루어져있는데 매우 모호해서, ‘관찰자의 주관’에 따라 보이는 세계가 다를 수 있다는 것입니다.
‘관찰자의 주관’, 즉 ‘내가 보려고 하는 대로 보인다는 것’, 이것은 우리 삶에도 그대로 적용됩니다. 
 
누가 황홀경에 빠져서 하늘을 보며 기도를 한다고 합시다.
그러면 그 사람은 우리가 보는 하늘(sky)을 보는 것일까요, 영적인 하늘(heaven)을 보는 것일까요?
혹은 누군가 꽃의 아름다움에 매료되어 있다면 그는 꽃을 보는 것일까요, 아니면 아름다움을 보는 것일까요? 
 
물질인 꽃을 보고 있다면 눈에 보이는 세상을 보고 있는 것이고, 아름다움을 보고 있다면 비 물질세계인 창조주를 보고 있는 것입니다. 
 
사제가 미사 때 제병을 높이 들어 올리면 어떤 이들은 그것을 밀떡으로 보고 어떤 이들은 그것을
그리스도의 몸으로 봅니다. 
이는 마치 사람도 눈에 보이는 육체와 보이지 않는 영혼으로 구성되어 있는 것과 같습니다. 
 
어떤 사람은 육체를 보고 어떤 사람은 그 사람의 영혼상태까지도 봅니다.
어떻게 보이느냐는 그 관찰자의 주관에 따른 것입니다. 
 
모든 것이 이런 것입니다. 
관찰자의 주관, 즉 보고 싶은 대로 보이는 것입니다.
즉 무엇을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 그 보는 사람의 상태가 결정된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성체를 밀떡으로 보는 사람과 그리스도의 몸으로 보는 사람은 그 보는 것의 차이로 하느님의 자녀와 단순한 사람의 자녀로 구분되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대부분의 예수님 고향 사람들은 예수님을 받아들이려 하지 않고 못마땅하게 여깁니다.
그러나 개중에는 예수님을 믿어서 기적을 체험하기도 합니다. 
 
이는 다른 이유가 없습니다. 
자아의 눈으로 보는 사람은 예수님이 어둠으로 보이는 것이고, 은총의 눈으로 보는 이는 예수님이 빛으로 보이는 것입니다. 
 
어떻게 보이느냐는 외적인 문제가 아니라 바로 자신이 어떤 안경을 끼고 있느냐의 문제입니다.
탈출기에서 하느님께서 아홉 번째 재앙으로 어둠을 내리셨는데, 이스라엘 백성에게만 빛이 비추이고 파라오와 이집트 백성들에게만 어둠이 내렸다고 하는 것과 같습니다. 
 
마음이 어둠이면 세상도 어둠이고, 마음이 빛이면 세상도 빛입니다.
그러나 세상을 빛으로 보기 위해서는 내 안에 빛이 있어야 하는데 오직 자신의 주인을 빛으로 받아들인 백성이라야 세상이 빛으로 보이는 것입니다. 
 
무학대사가 이성계에게 부처 눈에는 부처가 보이고 돼지 눈에는 돼지가 보인다고 말한 것과 같은 것입니다. 
 
만약 우리 눈에 무언가가 선으로 보인다면 우리 안에 선이 들어있기 때문이고, 악으로 보인다면 우리 안에 악이 들어있기 때문입니다. 
 
법정 스님은 꽃이 아름다운 이유는 우리 안에 꽃이 있기 때문이라고 하였습니다.
우리 안에 아름다움이 들어있지 않으면 일반 동물들처럼 아름다움을 구별할 수 없는 것처럼
우리 안에 선에 있으니 선을 볼 수 있는 것이고 악도 있으니 악도 볼 수 있는 것입니다. 
 
오직 전지전능하신 하느님만이 악을 악으로 보지 않고 모든 것을 사랑으로 바라보십니다.
그러나 유다에게서 보듯이 마귀가 되어버린 사람은 어떤 선도 다 악으로만 보이게 되는 것입니다. 
 
이는 마치 꿀벌이 꽃만 보고 똥파리가 똥만 보는 것과 같습니다.
자신의 존재가 선과 악, 어떤 것을 택하느냐에 따라 그렇게 바라보고, 또 본질도 그렇게 변해가는 것입니다. 
 
따라서 죄가 많은 사람은 절대로 긍정적일 수 없습니다. 내가 은총의 눈으로 보면 모든 것이 은총이고, 죄의 눈으로 보면 모든 것이 못마땅하게 보이게 되어 있습니다. 
 
요셉이 꿈을 꾸었습니다. 
부모와 형들이 자신에게 절을 하는 꿈이었습니다.
형제들은 이것의 부정적인 면만을 보았습니다.
그러나 요셉은 그런 말을 하면서도 부정적인 면을 보지 못했습니다.
만약 그랬다면 뻔히 미움 받을 것을 알면서 그 꿈을 형제들에게 이야기하지는 못했을 것입니다. 
 
결국 긍정적인 면을 본 요셉은 온갖 어려움도 잘 받아들일 수 있었고 그 꿈이 실현되는 것을 보게 되었습니다. 
 
나의 존재가 어떠한 상태인지 알고 싶다면 하루에 감사를 얼마나 하는지, 혹은 불평을 얼마나 하는지 살펴보면 됩니다. 
 
똑같은 세상을 보면서도 어떤 사람은 부정적인 것만 보고 또 어떤 사람은 긍정적인 면만을 봅니다.
어떤 사람은 감사하고 어떤 사람은 불평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을 받아들이지 못한 이들은 매사를 부정적으로 바라보는 사람들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의 인성만을 보고 신성을 보지 못하는 것입니다.
사람만을 보는 이유는 그것을 보는 사람이 지극히 사람이기 때문이고 영적이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영적인 인간만이 그리스도의 신성을 볼 수 있습니다.
우리는 음과 양, 육체와 영혼, 인성과 신성을 다 볼 수 있는 눈을 가져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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