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활을 안 믿는 자에겐 부활이 없는 이유
영화 ‘47m’(2017)는 상어가 가득 찬 멕시코 바닷속에 떨어진 두 영국 여성의 탈출 이야기입니다.
케이트와 리사는 케이지 안에 들어가 7m나 되는 상어들을 보는 익스트림 스포츠에 도전합니다.
리사는 들어가기 전까지 겁을 먹었지만, 바닷속의 환상적인 풍경을 보고 신나서 감탄합니다.
한창 재밌던 중 케이지를 매달고 있던 줄이 끊어져서 엄청난 속도로 물속 47미터 바닥으로 추락합니다.
떨고 있는 리사를 대신해서 케이트가 무전을 하기 위해서 수심 40미터 지점까지 올라가 무전에 성공합니다.
케이지에 다시 매달아 들어 올릴 고리를 가지고 구조하러 온 사람은 리사의 눈앞에서 상어에게 잡아먹힙니다.
리사는 상어를 피해 하비에르의 가방에서 작살과 케이지에 매달 인양용 줄을 가져옵니다.
리사는 무전으로 구조 대원의 사망과 인양 줄 확보를 알려주고 케이지에 줄을 묶고 케이지에서 기다리니 드디어 움직이기 시작합니다.
30미터 지점도 넘어 둘은 구조되는듯했지만, 줄이 가늘어서 또 끊어져 다시 떨어집니다.
떨어지면서 리사의 다리가 케이지의 철근에 깔려 리사는 움직일 수 없는 상황이 됩니다.
위에서 공기탱크 두 개가 떨어집니다.
그동안 질소중독에 걸릴까 봐 내려보내지 않았던 것입니다.
케이트는 산소통을 집어 케이지로 잽싸게 이동하려 하는데 순간 상어에게 물립니다.
리사는 케이트의 죽음에 절망하지만 정신을 차리고 케이지 바깥 가까운 곳에 떨어진 새 공기탱크를 가져오기 위해 케이지에 걸려있던 작살총을 쓰기로 하는데 작살은 억지로 안으로 가져오려다 방아쇠가 바깥 나사에 걸려 발사되는 바람에 자기 왼손을 찌르고 맙니다.
피가 나고 공기 게이지는 0바입니다.
겨우 공기탱크를 작살로 가져오는 데 성공해서 교체합니다.
그때 무전으로 케이트의 목소리가 들립니다. 상어에게 공격받아 상처는 입었지만 살아있었습니다.
리사는 자기 조끼를 낀 곳에 넣어 부풀려 다리를 빼내고 케이트를 구하러 갑니다.
그러나 케이트의 다리가 심하게 물려 피가 흐르고 피 냄새를 맡은 상어가 더 꼬이는 상황이라 어쩔 수 없이 죽기 살기로 위로 올라가기로 결심합니다.
30미터 위치에서 잠수병 예방을 위해서 5분 대기하라는 말을 듣고 마지막 신호탄을 키는데 사방에 상어가 천지입니다.
그리고 이 신호탄도 얼마 못 가서 꺼지고 둘은 전속력으로 수면 위로 올라갑니다.
구명 링에 매달려 둘은 사는 듯했지만 리사가 상어에 물려 수면 밑으로 사라집니다.
리사는 상어의 입을 꽉 막고 상어 눈을 손가락으로 찔러 풀려나서 다시 구조됩니다.
이렇게 둘은 구조되어 배 위에서 상어에게 물린 다리의 상처를 치료받습니다.
그런데 안도하고 있던 리사의 다친 손이 피가 흐르지 않고 물속인 듯 공기에 퍼지고 있었습니다.
알고 보니 리사가 물속에서 공기탱크를 너무 오랫동안 사용해서 질소중독으로 환각이 나타나고 있었던 것입니다.
혼자 남은 리사가 겨우 공기통을 건져 다리가 아직 케이지에 낀 채로 케이트가 죽은 사실을 인지하지 못한 채 구조되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잠시 후 무장한 멕시코 해양 구조대가 도착해서 리사를 구조해서 수면으로 올라오고 영화는 끝납니다.
이 세상은 마치 바닷속과 같습니다. 우리 생명은 각자의 산소통에 든 산소의 양에 달려있습니다.
산소가 충분한 바다 위로 올라가면 더는 죽음에 대해 걱정할 필요가 없습니다.
만약 산소가 다 떨어져 가는 것만 겁낸다면 바닷속은 지옥이 됩니다.
서두르지 말고 누군가가 계속 산소통을 내려줄 수 있고 언젠가는 구조대가 와서 바깥세상으로 자신들을 건져줄 것을 믿어야 합니다.
이것이 부활 신앙을 가진 사람과 갖지 않은 사람의 차이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사두가이들이 나옵니다.
이들은 부활이 없다고 주장하는 현세주의자들입니다.
마치 바닷속이 전부이고 산소, 곧 생명으로 가득 찬 세상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 세상에서 서로 산소를 빼앗으려 아비규환이 될 것입니다.
부활을 믿지 않는 사두가이들이 많을수록 세상은 서로 살려고 남을 해치는 지옥이 됩니다.
사실 지금 세상이 그렇게 나아가고 있습니다. 그런데 케이트와 리사는 서로 돕습니다.
그 이유는 새로운 세상, 곧 생명으로 가득 찬 세상에 대한 희망이 있기 때문입니다.
부활을 믿지 않아서 좋을 게 하나도 없습니다. 반드시 생명이 가득 차서 이 지상에서는 각자의 산소통 하나로 살지만 굳이 산소통이 없어도 영원히 숨을 쉴 수 있는 생명으로 가득 찬 영원한 세상이 존재한다는 믿어야 합니다.
이것이 이 지상의 삶에서 서로 사랑하며 살 수 있게 만들어주는 믿음입니다.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그분은 죽은 이들의 하느님이 아니라 산 이들의 하느님이시다.
사실 하느님께는 모든 사람이 살아 있는 것이다.”(루카 20,38)
생명의 주인이신 하느님의 시선으로서는 인간들이 각자의 산소통으로 바닷속에 있어도 곧 죽을 인간들이 아닌 영원히 사는 인간으로 보입니다. 우리에게 언제든 산소통을 넣어줄 수 있고 또 질소중독에 걸리기 전에 천사를 보내어 우리를 위로 끌어올려 주실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부활이 없다고 믿는 이들은 얼마 남지 않은 산소 게이지가 줄어드는 것을 보며 두려워합니다.
그리고 생존하기 위해 하는 모든 행위를 정당화합니다.
이 세상에서 부활이 있다고 믿는 이는 그래서 산 이들이고 부활이 없다고 믿는 이는 죽은 이들입니다.
하느님은 우리를 산소통이 고갈되면 언제나 끌어올려 주실 수 있다고 믿는 이들만을 구원해 주실 수 있습니다.
혼자 힘으로 살아보겠다고 하는 이들은 상어에게 물립니다. 그냥 안전한 곳에서 기다리기만 하면 됩니다.
리사는 다행히 케이지에 다리가 끼어 움직일 수 없어서 살았습니다.
살려고 하면 죽고 죽으려고 하면 사는 것입니다. 부활이 없다고 믿어서 좋을 게 없습니다.
이제 부활에 대해 더 확실한 믿음을 가질 필요가 있겠습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원죄로 바닷속으로 가라앉은 우리를 구하라고 구세주를 보내주실 하느님이 계심을 믿어야 합니다.
그분께서 우리를 위해 목숨을 거실 분임을 믿어야 합니다.
위에 어떤 신이 존재한다는 것을 믿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 신이 사랑임을 믿는 것이 중요합니다.
사랑이 없다면 어떤 신도 목숨을 내어놓고 우리를 구하러 오지 않으실 것입니다.
부활을 믿는다는 말은 하느님이 사상이심을 믿는다는 말과 같습니다.
이미 구원된 것입니다.
아담과 하와는 하느님을 무자비한 분으로 믿어서 에덴동산에서 살 자격을 잃었습니다.
하느님께서 예수님을 우리에게 보내셨다는 것이 표징입니다.
위에서 목숨을 걸고 바닷속으로 누군가를 보낸 것을 믿는다면 이제 우리는 걱정할 필요가 없습니다.
케이지 안에서 즐기기만 하면 됩니다. 그 케이지가 하느님은 사랑이시라는 표징은
그리스도의 살과 피가 전해지는 교회입니다.
‘닥터 지바고’에서 지바고의 이복형은 우연히 수력발전소에서 근무하는 한 젊은 여성 타냐가
자기 동생 지바고의 딸임을 알아봅니다. 꼬마로프라는 사람이 타냐의 어머니인 라라를 차지하기 위해 거짓말까지 해가며 타냐를 키운 것입니다.
이것이 장군과 그의 조카인 타냐의 대화입니다. 장군이 묻습니다.
“어떻게 아버지와 헤어지게 됐느냐?”
타냐가 주저하며 울먹거리다가 겨우 대답합니다.
“사실은 불길 속에서 아버지가 내 손을 놔 버렸어요.”
장군은 잠깐 숨을 고른 후에 대답합니다.
“네가 아버지라고 생각했던 꼬마로프스키는 너의 친아버지가 아니다.
너의 친아버지는 닥터 지바고다. 진짜 아버지라면 불길 속에서도 자녀의 손을 놓지 않는 법이다.
아버지란 존재란 그런 것이다. 언제 어떤 상황을 만나더라도 우리의 손을 놓지 않는 분이 아버지다.”
우리에겐 하늘에서 우리를 구조하기 위해 산소통도 보내고 양식도 보내고 상어에게 물릴 것을 알면서도 아드님까지 보내신 분이 계심을 믿습니다. 안 믿어서 좋을 게 없습니다.
허둥대다 상어에게 결국 먹힙니다. 믿으면 케이지 안에서 바다를 즐길 수 있습니다.
부활을 믿어야 부활하는 이유는 그래야 안전한 케이지 안에 머물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물으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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