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앙에 기도와 공부가 균형을 이루어야 하는 이유
영화 ‘식스 센스’(1999)에서 말콤은 실력 있는 정신과 의사입니다.
어린이들을 잘 치료해서 주지사에게 상도 받았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자신이 치료해주던 한 아이에게 총격당합니다.
몇 달 뒤 말콤은 콜이라는 아이를 맡게 됩니다. 자신이 실패했던 그래서 자신에게 총을 쏘았던 그 아이와 같은 증상입니다.
이번에는 실패하지 않으려 다짐합니다.
그래서 아이의 문제를 자세히 검토합니다.
그런데 사실, 문제는 말콤에게 있었습니다.
말콤은 환자의 말을 잘 들어주지 않았던 것입니다.
자신에게 총을 쏜 아이와 마찬가지로 콜도 귀신을 보고 있었습니다.
의사로서 이는 믿기 힘든 일이었습니다.
하지만 이번에는 믿어주기로 합니다.
가르치고 치료하는 자세에서 배우고 치료받는 자세로 바꾸기로 한 것입니다.
콜의 말을 믿어주니 방법도 떠올랐습니다.
콜에게 나타나는 귀신들의 원한을 풀어주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더 이상 무서워할 필요가 없을 것이라고 말해줍니다.
정말 원한을 풀어주니 귀신이 무섭지 않게 되었습니다.
자신에게 도움을 청하는 이들로 보일 뿐입니다.
이번에는 콜이 말콤에게 말합니다.
현재 말콤은 아내와 사이가 좋지 못합니다.
콜은 말콤에게 아내가 잠들었을 때 말을 해 보라고 합니다.
그랬더니 아내는 말을 잘도 받아주었습니다.
그러던 중 아내가 주는 자신의 결혼반지가 땅에 떨어졌습니다.
그동안 자신은 살아있는 사람이라고 착각했던 것입니다.
실상은 전에 총을 맞아 죽었었고 자신도 귀신이었던 것입니다.
오늘 복음의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이 이러한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전혀 배우려는 마음이 없는 사람들입니다.
가르치려고만 합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어린이처럼 되라고 하시며 어린이에게도 배울 것이 있다고 하십니다.
사람을 존중한다는 말은 누구에게나 배울 것이 있다는 것을 인정하고 배우려 하는 자세를 갖는 것입니다.
가르침을 받아들이지 않고 누군가를 공경한다는 말이 가능할까요?
그 누군가에게서 받은 사랑도 있겠지만 분명 받은 가르침도 있을 것입니다.
사랑과 가르침은 한 사람이 다른 사람에게 줄 수 있는 전부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자기 조상들이 죽인 예언자들의 무덤을 후손들이 만들고 있다는 것으로 그들의 소행에 동조하고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래서 조상들이 죽인 예언자들의 책임을 지금 세대들이 져야 한다고 하십니다.
이게 무슨 뜻일까요?
만약 그들이 조상들이 죽인 예언자들의 무덤을 만들지 않았다면 어땠을까요?
그러면 그들은 예언자들을 알아보지 못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니 죄가 없거나 줄어듭니다.
하지만 조상들이 죽인 예언자들의 무덤을 만들고 있으니 그들은 예언자를 알아볼 눈이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그리스도를 박해하니 그들은 몰라서 박해하는 것이 아니라 알면서도 박해하는 것임이 드러난 것입니다.
예수님은 예언자가 예루살렘 아닌 곳에서 죽을 수 없다고 하시며 당신이 예언자심을 밝히셨습니다.
예언자들이 하려던 말이나 예수님께서 하시려던 말씀이나 다를 게 없습니다.
그래서 그들에게 죄가 있는 것입니다.
만약 그들이 예언자들의 지식을 배웠다면 예수님도 알아볼 수 있었을 것입니다.
우리는 지금도 그리스도의 무덤을 만들고 그리스도를 경배합니다.
하지만 그리스도와 닮은 예언자들이 오면 어떨까요?
그들을 알아볼 수 있을까요? 그리스도께서는 ‘십일조’도 소홀히 해서는 안 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지금 십일조를 바치라고 하면 교회에서 환영받을까요?
예수님은 모시면서도 그분의 말씀은 받아들이지 않는 것입니다.
그것은 당시에나 해당하는 말이라고 합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 당시에만 해당하는 말을 단 한마디라도 하셨을까요? 진리는 영원합니다.
진리 자체이신 분이 당시에만 해당하는 말씀을 하실 수는 없습니다.
그런데도 교회에서 십일조 이야기하면 대부분이 반대합니다.
‘지옥’에 관한 이야기도, ‘심판’에 관한 이야기도, ‘공동체’에 관한 이야기도, ‘선교’에 관한 이야기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과 교리에서 가르치는 것을 그대로 말해도 그 말을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그러면서 성인들을 섬기고 그리스도를 섬깁니다. 이것이 알면서도 받아들이지 않고 받아들이지 않으면서도 겉으로는 섬기는 척하는 죄입니다. 그리고 그 책임은 반드시 져야 합니다.
우리가 무엇부터 회개해야 하는지 되돌아보아야 합니다.
전에 어디서 읽었던 예화 내용을 제 생각대로 정리해봅니다.
어떤 선교사가 문명을 접해보지 못한 아마존의 오지로 들어갔습니다.
선교사는 그들의 언어를 배우고 그들에게 문명의 이로움을 알려주며 호감을 얻었습니다.
선교사는 그들에게 신처럼 받아들여졌습니다.
선교사가 나이가 들어서 죽을 때가 되자 선교사는 자신의 가르침을 책 한 권에 그들 언어로 써서 그들에게 남겼습니다.
부족은 선교사의 죽음을 매우 슬퍼하였습니다. 그리고 그 책 한 권을 소중히 간직하기로 하였습니다.
사람의 손을 타지 않게 우선 사제만 볼 수 있는 권한을 주었습니다.
시간이 지나며 사제도 그 책을 보기가 부담스러웠습니다.
그래서 사원을 만들어 가장 깊숙한 곳에 책을 숨겨두고 매일 예배를 드렸습니다.
그것도 만족하지 못한 부족은 분실할 위험을 없애기 위해 아예 금고에 넣어놓고 일 년에 한 번만 꺼내 예배를 드리기로 하였습니다.
그렇게 그들은 자신들에게 많은 이익을 준 선교사를 기억했습니다.
하지만 선교사가 알려준 대로 신앙을 지켜나가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은총과 진리를 주십니다. 성찬의 전례와 말씀의 전례입니다.
성물방에서 보면 성물과 책이라 할 수 있습니다. 저는 다행히 하.사.시.를 읽고 사제가 되기로 결심하였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거의 책이 사라지는 추세입니다. 진리의 열쇠가 사라지는 것입니다.
이는 은총을 위해 기도는 하되 공부는 하지 않는 것을 의미합니다.
기도와 공부의 균형이 맞아야만 합니다.
그래야 책을 묻어놓고 선교사만 기리는 부족처럼 되지 않습니다.
레지오 회합에서도 맨날 교본만 공부합니다. 하지만 교본에서는 프레시디움이 생긴 지 처음 몇 년만 교본으로 하고 나머지는 영적독서를 하라고 쓰여 있습니다.
실제로는 교본대로 하지 않는 것입니다.
10년을 레지오를 했다면 적어도 영적 독서 10권은 읽었어야 합니다.
하지만 교본만 읽으며 지식을 쌓지 않았던 것입니다.
이제 묵주기도의 은총과 영적 독서의 균형을 바로잡아야 합니다.
그래야 발전이 있습니다.
‘지식의 열쇠’는 ‘배우려는 마음’입니다.
은총의 열쇠와 함께 지식의 열쇠도 간직한 우리 공동체가 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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