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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묵상

9월 15일 _ 전삼용 요셉 신부

작성자 : 홍보실 작성일 : 2022-09-15 조회수 : 702

영화 ‘아문센’(2019)은 남극점에 세계 최초로 도달하게 된 아문센의 남극 탐험 과정을 그리고 있습니다.
어렸을 때부터 탐험 정신이 뛰어났던 그는 누구도 가보지 못한 북극 탐험에 대한 꿈을 꿉니다.
한창 모든 것이 준비되어 있었을 즈음 북극에 처음으로 도달한 사람이 생겨납니다.  
 
하지만 그는 자포자기할 수 없었습니다.
꿈을 이루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선원들을 속이고 남극으로 향합니다.
물론 이 이야기를 들은 선원들은 놀랍니다.
아문센은 “남극점이 아니면 죽음을….”이란 정신으로 타인의 희생을 모른척합니다.
각자 살아남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들은 이 과정에서 동료를 그냥 내버려 두기도 하고 유럽인들이 혐오하는 일인 개를 잡아먹는 일을 서슴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영국의 스콧이 이끄는 탐험대보다 먼저 남극에 깃발을 꽂습니다.
영국은 그들의 비인간적인 탐험 과정을 대서특필하며 아문센의 업적을 깎아내렸지만
아문센은 자신의 나라 노르웨이에서는 영웅이 됩니다.  
 
이 영화를 보며 ‘아문센만 고통을 감내하며 목적지로 나아가는가?’라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아문센만이 아닐 것입니다.
인생은 고통을 통해 무언가를 얻으려는 여정입니다.
한 명도 이 여정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원하든 원하진 않든 고통을 당해야만 합니다.
인생은 그래서 고통의 바다라고 불립니다.  
 
우리가 받는 고통에는 반드시 보상이 따릅니다. 보상 없이 당하는 고통은 없습니다.
다만 그 고통에 대한 보상을 누구에게 받느냐를 정하는 것은 우리 자신입니다.
아문센은 역사에 길이 남는 탐험가가 되기로 하였습니다.
그 의도로 어느 정도의 희생은 감수해야 했습니다.  
 
아프리카의 밀림지대에 파견된 어느 병사가 있었습니다.
그가 소속되어 있던 부대는 밀림 한가운데서 적들에게 포위당해서 그 병사만 살고 전멸했습니다.
사람들은 그들이 모두 죽었을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6개월 뒤 그 병사는 혈혈단신으로 밀림을 헤쳐나와 구조되었습니다.
그를 발견했던 사람들은 그가 손에 꼭 쥐고 있던 지도를 보고 생각했습니다. 
 
“역시 그는 밀림의 지도를 지니고 있었기 때문에 살아난 거야!”
하지만 그가 펼쳐 보인 종이에는 밀림의 지도가 아닌 영국의 지하철 지도였습니다.
그는 런던의 지하철 지도를 그리고 그것을 보면서 포기하지 않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에게 그게 받는 고통에 대한 보상은 다시 런던으로 가서 일상을 회복하는 것이었습니다.  
 
보상이 없다면 우리는 아주 작은 고통도 감내할 수 없습니다.
가지만 가미카제 특공대를 생각해봅시다.
그들의 고통은 나라로부터 주어지는 명예였습니다.
나라는 명예를 줄 테니 목숨을 바치는 고통을 감내하라고 부추겼습니다. 
그렇게 많은 이들이 생을 마감하였습니다.
하지만 나라가 생명을 바친 고통에 대해 보상해 줄 수 있을까요? 그럴 수 없습니다.
나라는 창조주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고통에 대한 보상은 결국 “우리가 누구를 위해 고통을 당하느냐?”에 의해 결정됩니다.
나 자신을 위해 고통을 당하면 그 보상은 나 자신이 주어야 합니다.
힘든 일이 끝나고 시원한 맥주 한 잔을 자신에게 돌려주고 또 그 일을 끝냈다는 만족감에 미소 짓는 행위입니다. 
 
그러나 나라는 존재가 줄 수 있는 보상은 거기까지입니다. 언제까지나 이렇게 살 수 없습니다.
결국엔 내가 하는 고통에 비해 충분한 보상이 오지 않는다고 여길 때는 그 보상이 걷잡을 수 없는 중독으로 빠집니다. 알코올 중독과 약물 중독 등의 모든 중독은 자기 자신을 위해 사는 사람들이 결국엔 겪게 되는 입니다.  
 
결국엔 결정하는 수밖에 없습니다.
나를 위해 고통을 감내하며 살 것인지, 가족을 위해 그렇게 할 것인지, 나라를 위해 그렇게 할 것인지, 혹은 하느님을 위해 그렇게 할 것인지. 내가 누구를 위해 고통을 감내하느냐에 따라 그 보상이 달라집니다.
하지만 하느님으로부터 보상을 기대하는 것이 가장 좋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하느님을 위해 살며 하느님 때문에 고통을 당하기를 결심하기 위해서는 두 가지 커다란 문제에 직면합니다.
진짜 하느님이 계신지를 우리는 확신할 수 없습니다. 두 번째는 어떻게 해야 하느님을 위해 고통을 당하는지, 그 방법을 모르는 것입니다.  
 
하느님이 계신지, 아닌지를 믿는 것은 그냥 ‘선택’입니다. 어차피 믿음은 모험입니다.
나를 위해 고통을 감내하든, 가족이나 나라를 위해 고통을 감내하며 살든 나의 결정이고 하나의 투자입니다.
다만 누군가를 위해 고통을 감내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죽음뿐입니다.
그러니 더 큰 보상을 기대하려면 더 큰 보상을 주실 수 있는 대상, 곧 하느님을 위해 고통을 감내하는 편이 좋을 수밖에 없습니다.  
 
차 사고로 몸 55%에 3도 화상을 입고도 살아난 이지선 씨가 있습니다.    
이지선 씨는 대학교 4학년 때 오빠와 차를 타고 신호대기를 하던 중 뒤에서 음주운전 뺑소니 차량에 사고를 당했습니다.
온몸에 화상을 입었고 의사도 포기한 상태였지만 기적적으로 살아났습니다.  
 
그러나 사는 것이 더 큰 고통이었습니다.
40번의 수술을 해야 했으며, 진통제의 효과가 떨어지는 몇 시간 동안은 극도의 고통을 당해야 했고, 살이 오그라들어 눈과 입을 몇 달 동안 깜빡이거나 다물 수 없었습니다.
목의 살이 오그라들어 머리를 들어 하늘을 볼 수 없어서 목과 척추까지 휘어져야 했습니다. 
 
이제 그녀는 정해야 합니다.
이 고통을 누구를 위한 것으로 만들지. 그리고 하느님을 위한 고통으로 삼기로 했습니다.
목사님이 그녀에게 “자매님은 반드시 살게 될 것이고, 또 세상에 희망을 전하는 큰일을 하게 될 것” 이라는 말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그 말씀을 믿으니 자신이 당하는 지금의 고통이 하느님의 뜻을 자신의 고통으로 이루도록 허락한 것에 감사한 마음이 들었습니다.
억지로라도 그렇게 생각해야 했습니다.
손가락이 곪아 8개를 잘라내야 한다는 말을 들었을 때 울고 있는 엄마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엄마, 더 많이 자르지 않아서 감사하지?”
이지선 씨는 “아주 작은 것에서부터 감사를 찾으려고 했다.”라고 말합니다.
사고를 낸 사람의 차가 보험에 들어 있어서 감사했고, 몇 달 만에 눈을 깜빡거릴 수 있게 되었을 때 감사했고, 손가락으로 글을 쓰고 숟가락을 들 수 있는 것에 감사했으며, 환자복의 단추를 혼자 힘으로 끼울 수 있어서 감사했고, 문을 열 수 있어서 감사했으며, 무엇 보다 살아있다는 것에 대해 감사했습니다.
그러다 보니 지금은 매우 행복해서, ‘진심으로’ 과거의 예뻤던 얼굴로 돌아가고 싶은 마음은 없다고 당당히 말합니다. 
 
나의 고통에 대한 보상을 주는 대상을 선택하는 방법은 결국 ‘감사’입니다.
나 자신에게 감사하면 나 자신이 보상을 줄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살다가는 중독자가 됩니다.
혹은 가족이나 나라에 감사하면 됩니다. 하지만 그것도 충분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더 큰 보상을 위해 나아가거나, “이게 다야?” 하며 스스로 보상을 주려 할 것입니다.
결국 죄로 떨어지는 것입니다.  
 
오늘은 성모 마리아의 고통을 묵상하는 날입니다. 성모님은 예수님을 위해 고통을 당하셨습니다.
하느님을 위해 고통을 당하신 것입니다.
그렇게 투자하셨습니다.
그래서 아들을 죽이는 이들을 미워하지 않고 모든 고통을 감내하실 수 있었습니다. 
 
사실 우리가 성모 마리아께서 어떠한 보상을 받으셨는지 눈으로 직접 보지는 못하였습니다.
그렇더라도 아문센이나 가미카제 자살 특공대보다 덜 행복한 삶을 사셨다고 감히 말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이지선 씨는 자신의 이런 마음이 ‘가난’이라고 말합니다.
우리도 가진 것을 다 잃고 그렇게 가난해졌을 때도 자신에게 빛이 되는 복음을 가져야 합니다.
가진 것만 나눌 수 있습니다.
우리에게도 피조물에게 전할 복음이 꼭 있어야겠습니다. 
 
나를 위해서, 이웃을 위해서, 하느님을 위해서 
 
내가 이런 고통을 받게 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감사의 대상은 모든 것을 그렇게 일어나게 해 주신 존재, 곧 하느님. 나의 고통의 보상을 주님께 받으려면 해야 하는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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