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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묵상

8월 21일 _ 전삼용 요셉 신부

작성자 : 홍보실 작성일 : 2022-08-21 조회수 : 886

루카 13,22-30 

 

좁은 문: “오늘 어떻게 살까?”, 아니 “어떻게 죽을까!” 

 

영화 ‘죽어야 사는 여자’(1992) 줄거리입니다. 매들린은 아주 잘 나가는 브로드웨이 뮤지컬 배우입니다.

하지만 세월은 속일 수 없는 법. 매들린은 늘어가는 주름이 걱정입니다.

이때 어릴 적 친구 헬렌이 남자친구 멘빌 박사를 소개하겠다고 옵니다.

멘빌은 유망한 성형외과 의사입니다.  

 

매들린은 헬렌의 남자친구에게 치근댑니다. 멘빌도 매들린이 싫지 않습니다.

헬렌은 매들린이 항상 자기 남자친구를 빼앗았다며 당하면 안 된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멘빌은 그렇지 않겠다고 해놓고는 매들린과 결혼해버립니다.

헬렌은 상심한 나머지 폭식하여 살이 찌고 정신병원에 갇힐 정도로 피폐해집니다.  

 

몇 년이 지난 후 헬렌이 파티를 한다고 매들린과 멘빌을 초대합니다.

매들린은 헬렌이 얼마나 망가져 있는지 보려고 갔지만 헬렌은 훨씬 젊어 있고 아름다워져 있었습니다.

이번엔 헬렌이 멘빌을 다시 꼬십니다.

멘빌도 자신을 자기 주름보다 못하게 여기는 매들린이 지겹습니다.

그래서 매들린을 죽이기로 합니다.  

 

계단에서 밀어서 매들린을 떨어뜨린 멘빌은 헬렌에게 전화합니다.

그런데 매들린이 목이 꺾인 채로 멘빌에게 다가옵니다.

멘빌은 기겁합니다.

매들린은 헬렌에게 질 수 없어서 영원히 죽지 않는 약을 먹은 것입니다.

그 약을 먹으면 몸은 좀 망가져도 죽지는 않습니다. 누가 좀 고쳐주면 됩니다.

하지만 의사들은 이 모습을 보고 기겁하고 심지어 심장마비로 죽기까지 합니다.  

 

이때 매들린이 죽은 줄 알고 헬렌이 들어옵니다. 매들린은 자기를 죽이려 했다며 헬렌을 총으로 쏴서 배를 뚫어버립니다.

하지만 헬렌도 죽지 않습니다.

헬렌도 그 약을 먹었던 것입니다.

이들은 둘이 죽도로 싸우다가 그럴 필요가 없음을 깨닫게 됩니다.

영원히 살려면 자기 몸들을 고쳐 줄 의사가 있어야 하는데 멘빌이 가장 적합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둘은 서로 화해하고 멘빌에게도 영생의 약을 먹도록 권합니다.

멘빌은 괴물이 되어 버린 두 여자를 두고 도망을 칩니다. 그리고 영생의 약을 버립니다.

그는 죽기를 택한 것입니다.  

 

37년 뒤 멘빌의 장례식이 열립니다.

멘빌은 다시 결혼하여 자녀도 많이 낳고 모험도 즐기다 세상을 떠났습니다.

많은 이들이 슬퍼합니다.

하지만 뒤에서 두 명의 여인은 비웃습니다. 바로 매들린과 헬렌입니다. 

 

이들은 “사람들의 기억 속에 남으면 뭐 하냐, 살아있는 게 낫지!”라고 말합니다.

하지만 눈은 슬픕니다.

아무 의미 없는 하루를 또 살기 위해 나갑니다.

그들의 몸은 이미 망가질 대로 망가져 있습니다. 아무도 고쳐주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영화가 끝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고 권하십니다.

좁은 문은 한 마디로 “십자가의 삶”입니다. 예수님은 그 십자가의 삶을 택하는 이들이 많지 않을 것이라고 하십니다.

비록 미사에 와서 강론을 듣고 성체를 영하더라도 이 길을 통해 오지 않으면 구원이 없다고 하십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십자가의 삶을 살고 있다는 증거는 어디서 찾을 수 있을까요?

아침에 일어나 우리 입에서 나오는 첫 마디로 알 수 있습니다. 

“오늘 어떻게 살지?” 

 

이것은 영원히 살 것 같은 착각으로 사는 사람의 질문입니다.

매들린과 헬렌이 영생의 약을 먹고는 매일 아침 그렇게 물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죽음을 택한 멘빌 박사는 다릅니다.

영원히 살 것처럼 사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질문하지 못하는 것이 이것입니다. 

“오늘 어떻게 죽을 수 있을까?” 

 

어차피 죽는 인생, 어떻게 잘 죽을 수 있는지를 생각하며 사는 것입니다.

이것이 십자가의 삶입니다.

어디 그렇게 사는 사람이 있느냐고 할 수 있지만, 실제로 적지 않습니다.  

 

이순신 장군도 명량해전을 앞두고 이렇게 말했습니다. 

“살고자 하는 자는 죽을 것이요, 죽고자 하는 자는 살 것이다.”

그는 죽고자 했던 것입니다.  

 

‘오늘 어떻게 죽을 수 있을까? 나의 죽음이 두려움을 용기로 바꿀 수 있다면!’

그리고 실제로 혼자서 330척과 대적해 싸웠습니다.

이것은 죽음으로 가는 길이었습니다.

이 모습을 본 나머지 11척도 죽자고 덤벼서 결국엔 말도 안 되는 승리를 거둘 수 있었던 것입니다.

오늘을 의미 있게 죽으려고 하는 삶, 이것이 좁은 문으로 들어가는 삶입니다.  

 

영원히 살게 되면 더 완전한 모습으로 살려고 더 욕심을 부립니다.

하지만 죽으려 하면 생명 유지를 위해 간직한 아주 작은 것까지 이웃을 위해 내어줄 수 있게 됩니다.

내 힘으로 영원히 살려고 하는 것이 하느님처럼 되려는 마음입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도우심을 자신을 맡김은 하느님의 자녀됨으로 하느님처럼 됨입니다.

우리에겐 이 두 길밖에 없습니다.  

 

우린 지금 살아있습니다.

죽으려 하며 이웃을 살리는 사람이 될 것인지, 살려고 하며 이웃을 죽이는 사람이 될 것인지. 선택은 우리에게 달려있고 예수님은 어차피 한 번은 죽는 것, 죽으려는 삶으로 나아가보라고 권하십니다.  

 

이태석 신부님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분도 하루를 어떻게 죽을 것인지 생각하며 살았습니다.

그래서 더 의미 있는 죽음으로 나아갔습니다. 그리고 많은 이들 가슴에 희망을 씨를 뿌렸습니다.

그리스도를 닮은 삶을 산 것입니다.

구원받을 사람은 많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어떻게 죽으려 하기보다는 어떻게 살려고만 하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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