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오 19,3-12
모든 관계엔 ‘압도적인 뜻’이 필요하다
요즘 상영 중인 ‘한산-용의출현’을 보면 정말 이순신 장군을 존경하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조선 수군의 56척 학익진 공격으로 왜군의 73척을 공격하여 왜선 47척을 격파, 왜군 1만 명을 전사시킨 세계 역사에 길이 남은 압도적인 승리를 거두었습니다.
이 승리로 전쟁의 양상이 바뀌었습니다.
어떻게 이순신 장군은 육지에서만 사용하던 학익진 전법을 바다에서 쓸 생각을 했을까요?
이순신 장군이 싸워야 했던 상대는 일본군만이 아닙니다.
내부에서도 분열이 일었습니다.
영화에서는 원균이 그런 역할을 맡습니다.
원균은 상식에 어긋나는 생각을 하는 이순신 장군을 믿지 못하고 그런 식이면 자신은 빠지겠다고 합니다.
하지만 가뜩이나 우세한 일본에 원균까지 빠지면 이기기 어려운 상황이었습니다.
이순신 장군은 어느 날 꿈을 꿉니다.
적군을 말을 타고 쫓고 있었는데 갑자기 적군이 사라지더니 커다란 성이 자신을 둘러싸는 것입니다.
다시 돌아갈 수도 없는 상황에서 하늘에서 쏟아지는 화살을 받아낼 수밖에 없었습니다.
학익진은 이처럼 상대의 배를 성처럼 둘러싸는 전술입니다.
하지만 조총과 월선을 통해 전쟁하는 빠른 일본 배의 추격을 따돌릴 방법이 없었습니다.
학익진을 만드는 데 상당한 시간이 걸립니다. 그러면 일본 배들이 조총으로 쏘고 배에 달라붙어 월선하게 됩니다.
그러면 활로 싸우는 조선군이 이길 가망이 없습니다.
이때 거북선이 큰 역할을 합니다.
우리는 대포가 있기에 멀찍이서 포격을 가하는 방법이 가장 좋지만, 이것저것을 다 따졌을 때
학익진만큼 좋은 전술이 없었던 것입니다.
아무리 이순신에게 질투가 나고 반기를 들고 싶어도 전술에 대해 확신하고 있으니 원균도 이것에 따를 수밖에 없습니다.
결국 누군가를 일치시키는 일은 서로의 이견조율이 아닙니다.
모든 의견을 압도하는 뜻입니다.
모든 이견을 압도하는 뜻이 그 공동체에 존재한다면 공동체는 하나가 됩니다.
하지만 그 뜻이 없다면 공동체는 분열로 무너집니다.
오늘 복음에서 바리사이들은 모세는 이유만 있으면 아내에게 이혼장을 써주어도 된다고 말했다고 따집니다.
예수님은 부부 사이에 사람의 이유가 껴드는 것을 허락하지 않으십니다.
태초부터 하느님은 부부를 머리와 몸, 곧 하나가 되게 하셨다는 것입니다.
머리와 몸이 하나가 되었다면 더는 떨어질 수 없는 것처럼 하느님의 뜻이 부부 사이에 존재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은 하느님의 뜻이 사람의 뜻을 압도하게 하십니다.
“그러므로 하느님께서 맺어 주신 것을 사람이 갈라놓아서는 안 된다.”(마태 19,6)
자녀들이 서로 싸운다면 무엇이 필요할까요? 자녀들의 생존을 책임지는 부모의 뜻이 필요합니다.
자녀들끼리의 이견조율로는 평안할 날이 없을 것입니다.
부모의 뜻이 자녀들을 지배할 때 자녀들은 사이좋은 사이가 됩니다.
‘개는 훌륭하다’에서 한 지붕 일곱 마리의 서로 물고 뜯고 싸우는 개들이 등장했습니다.
사실 주인에게 사랑받고 싶어서 질투 때문에 싸우는 것입니다.
하지만 주인은 싸우지 말라는 뜻을 압도적으로 줄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오히려 개들에게 휘둘리기 때문입니다.
개들이 불쌍해서 눈물을 흘릴 뿐입니다.
강 훈련사는 주인이 압도적인 법이 되어주어야 한다고 합니다.
애정도 좋지만, 우선은 기계적으로 개들을 대하라고 합니다.
자신이 먼저 보여주고 이렇게 말합니다.
“규칙을 정확하게 강조하면서 따르는 느낌이 있죠?”
개들에겐 인간의 명령이 압도적인 뜻입니다. 개들끼리는 조율할 수 없습니다.
인간이 법이 되어주어야 개들에게 평화가 옵니다.
마찬가지 이유로 하느님께서는 부부에게도 형제간에도 교회 공동체에도 당신의 뜻이 스며들게 하십니다.
부부는 관계의 완성입니다.
하느님 앞에서 혼인 서약을 하는 이유는 하느님께서 맺어주셨음을 인정한다는 뜻입니다.
그러면 이제 그 서약을 목숨을 걸고 유지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하느님 뜻을 따르지 않으면 하느님을 외면하는 사람이 되기 때문입니다.
모든 관계 안에서 하느님 뜻을 찾읍시다.
그리면 그 사람이 맺는 관계에서 분열은 일어나지 않을 것입니다.
그리고 모든 것에서 승리하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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