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정한 것만 살아남는다. 그런데 다정해지려면….
송곳니를 드러낸 사자와 이를 피해 달아나는 사슴이 있습니다.
여러분은 누구를 구해주고 싶습니까?
세상에 더 많은 사자가 있기를 원하십니까, 아니면 착한 사슴이 뛰노는 숲을 원하십니까?
아마 두 종 중 하나가 멸종한다면 사자가 먼저 멸종할 것입니다.
인간은 세상을 지배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세상을 지배하는 인간은 인간처럼 강한 존재가 아닌 다정하고 온화하고 순종적인 사슴과 같은 존재가 세상을 채우기를 원합니다. 왜 그럴까요?
왜 인간은 사슴 같은 순수하고 착한 것을 살게 하고 싶을까요?
인간은 히틀러처럼 한 민족을 말살하고 싶을 정도로 잔인한 존재인데도 말입니다.
토머스 헉슬리는 『생존을 위한 투쟁: 프로그램』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늑대에게 공격받는 사슴을 보면 동정심이 든다. 사슴 같은 자를 순수하고 착하게, 늑대 같은 자를
독하고 악하게 여길 것이다.
용기와 열정으로 사슴을 지키며, 피가 철철 흐르는 무시무시한 늑대 소굴에서 구해내고 싶을 것이다.”
강한 자의 특징은 의외로 자비심에 있습니다.
그 이유는 강한 자는 집단을 형성하는데
그 집단생활에 적응하기 위한 능력이 자비심이기 때문입니다.
상대에 대한 자비심이 없다면 무리생활을 할 수 없습니다.
상대의 아픔을 느낄 수 있는 마음이 자비심입니다.
이 자비심이 클수록 더 큰 공동체를 형성하게 됩니다.
진화론적으로 볼 때 네안데르탈인은 그 친화력이 10명 정도였다고 합니다.
하지만 호모 사피엔스는 그들보다 100배 이상이었습니다.
여기에서 살아남을 수 있었던 것은 당연히 숫자가 많은 호모 사피엔스입니다.
더 많은 호모 사피엔스들이 모이다 보니 언어와 같은 소통 능력과 함께 거주하기 위해 기술적인 능력들이 발전할 수밖에 없습니다.
물론 이들에게 신이 모든 인간을 창조했다는 믿음이 있을 수 없기에 히틀러처럼 다 약한 종족을 사정없이 죽이는 잔인함도 동시에 표현되었습니다.
어쨌건 브라이언 헤어의 『다정한 것이 살아남는다』에서는 이 지구상에서 생존하기 위한 가장 중요한 요소는 ‘친화력’이라고 정의하고 있습니다.
친화력이란 타인에게 손톱과 이빨을 절제할 줄 아는 능력입니다.
이 친화력을 마치 늑대가 강아지가 된 것처럼 ‘자기 가축화’(self-domestication)라고 부릅니다.
20세기 러시아 학자 벨라예프와 류드밀라는 동물의 가축화 과정을 알아보는 실험을 진행했습니다.
그들은 야생 여우 중에 친화력이 강한 여우들을 선택하여 몇 번에 걸쳐 교배시켰습니다.
그랬더니 주둥이가 짧아지고 송곳니가 줄어들었을 뿐 아니라 포식성과 호전성이 감소하여 더 귀여운 모습으로 변했습니다.
또한 신경전달물질인 세로토닌이 야생의 보통 여우들보다 5배 많아졌던 것입니다.
자 그럼 세로토닌은 어떤 역할을 할까요? 인간에게 길든 여우는 사람의 손짓 의미를 알 수 있었습니다.
음식이 들어있는 그릇을 사람이 손으로 가리키면 개와 같은 길든 동물은 그 손짓을 알고 음식을 찾지만, 침팬지와 같은 동물은 그것을 믿지 않고 본인 능력에 의존하여 찾으려 합니다.
인간이 존재하는 한 그래서 개는 사라지지 않겠지만, 침팬지나 늑대는 사라질 것입니다.
보호를 받지 못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개만 가축화 한 것일까요? 이 책에서는 인간도 살아남기 위해 가축화하였다고 합니다.
인간 사회도 더 강한 자가 있고 약한 자가 있습니다.
강한 자 속에서 살아남으려면 송곳니를 숨기고 그 지시하는 바에 순종할 수 있어야 했습니다.
그러려면 타인의 마음을 읽는 능력이 있어야 하는데 이것이 자비심입니다.
[참조: ‘다정한 것이 살아남는다’, 유튜브 채널, ‘요요’]
자비심이 가장 강한 동물이 인간입니다. 자비가 없는 인간은 세상을 파괴하지만,
자비심이 큰 인간은 세상을 창조합니다.
그런데 그 자비심은 바로 자기 안에 있는 발톱과 송곳니를 덜어내는 십자가를 통해 형성됩니다. 내가 죽지 않으면 이 세상에서 살아남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사랑받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밥은 안 먹어도 40일은 살지만, 사랑을 4일만 받지 않아도 죽고 싶은 마음이 든다고 합니다.
지금 코로나로 하루에 10명이 넘는 사망자가 나오지만 사실 매일 자살로 죽는 사람이 40명 가까이 됩니다.
어느 게 더 큰 병이겠습니까? 눈에 보이는 바이러스일까요,
아니면 우리 마음 깊숙이 있는 사랑 받지 못하는 바이러스일까요?
금쪽같은 내새끼 107회에 ‘소아 무기력증’을 앓고 있는 금쪽이가 나옵니다.
인생 공허하고 아무 것도 하고 싶지 않고 살고 싶지 않은 모습의 초1 여자아이입니다.
아이가 무기력하고 두렵고 불안해하는 이유는 아이 부모의 부부싸움 때문입니다.
부부는 서로 이혼 직전까지 간 상황이기 때문에 아이들은 부모가 헤어질까 봐 더 불안합니다.
싸움은 왜 일어날까요? 내가 죽지 않아서입니다. 피 흘리지 않아서입니다.
친화력을 잃었기 때문입니다.
친화력은 결국 내 송곳니와 발톱을 자르는 일입니다.
그 일이 아니면 나도 죽고 자녀도 죽습니다.
자녀에게 가장 큰 교육은 부모의 행복한 모습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 환경 안에서 자녀들은 나빠질 수 없습니다.
살고 싶어지기에 자녀들도 이를 감춥니다.
그러면 세상에서 살 생명력을 얻습니다.
이 프로그램에서 부모는 임종 체험으로 관에 들어감으로써 서로의 존재를 확인하는 것으로 다시 사랑하기로 결심합니다.
자녀들은 매우 행복해합니다.
무엇이든 흐르지 않으면 생명력을 잃습니다.
돈은 통장에 갇히면 생명력을 잃습니다.
생명도 마찬가지입니다.
흐르지 않으면 생명도 생명력을 잃습니다.
흐르는 것만 생명력을 갖습니다.
따라서 목숨을 구하려는 사람은 목숨을 잃을 것이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이것은 법칙입니다.
생명이 흐르려면 죽어야 합니다.
에덴동산에서 아담과 하와는 선악과를 주님께 내어줄 수 없어서 가진 모든 것을 빼앗겼습니다.
가질 자격을 잃은 것입니다.
그 이유는 스스로 선악과를 내어줄 수 없는 것으로 만들어버렸기 때문입니다.
내어줄 수 없다면 나의 것이 아니라 내가 그것의 소유가 됩니다.
그것을 섬기게 되는 것입니다.
이는 재물도 마찬가지고 생명도 그렇습니다.
살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죽는 것입니다.
살려면 죽어야 합니다.
그래야 다정해집니다. 다정해야 살아남습니다.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
정녕 자기 목숨을 구하려는 사람은 목숨을 잃을 것이고, 나 때문에 자기 목숨을 잃는 사람은 목숨을 얻을 것이다.” (마태 16,24-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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