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유부단 혼합주의가 지배하는 교회: 햄릿이 될 것인가, 돈키호테가 될 것인가?
셰익스피어의 4대 비극 중의 하나인 ‘햄릿’의 이야기입니다.
12세기 덴마크 왕국 엘시노어 성에 자정이면 나타나는 죽은 왕의 혼령에 대한 소문이 퍼졌습니다.
유령을 본 햄릿의 친구 호레이쇼는 왕자에게 이 사실을 알립니다.
독일 유학 중이었던 햄릿은 아버지의 그 소식을 듣고 곧바로 돌아옵니다.
그리고 자정까지 기다렸다가 아버지를 만납니다.
유령이 된 아버지는 자신이 뱀에 물려 사고사로 죽은 것이 아니라 독살당했다고 말해주었습니다.
죄 중에 죽어서 회개할 기회가 없었기에 천국에 가지 못하고 구천을 떠도는 신세가 되었다고 했습니다.
햄릿이 왕이 되어야 하지만 현재는 아버지의 동생인 삼촌 클로디어스가 자신 어머니와 결혼하여 왕이 되어 있었습니다.
범인은 삼촌일 것임이 틀림없었습니다.
햄릿은 일단 시간을 벌기 위해 미친 척을 하기 시작합니다.
햄릿은 나라의 광대들을 모으고 ‘쥐덫’이라는 연극을 기획합니다.
왕이 어떻게 살해되는가를 현재의 왕 앞에서 보여주며 현 왕의 표정을 살피려 한 것입니다.
왕은 연극을 끝까지 보지 못하고 밖으로 뛰어나갑니다.
그리고 하느님 앞에서 자신의 죄를 뉘우치는 기도를 합니다.
햄릿은 그때 삼촌을 죽이고 아버지의 원수를 갚을 수 있었으나, 아버지는 지옥에 갔는데 삼촌이 회개하여 천국 가면 안 된다고 여겨 잠시 복수를 미룹니다.
햄릿은 자신도 좋아하고 자신을 좋아하는 오필리아라는 여인에게
“우리는 모두 저주받은 사람들이오. 수녀원으로 들어가시오!”라고 모질게 말합니다.
화가 난 오필리아의 아버지 폴로니어스는 이를 따지기 위해 왔다가 햄릿이 어머니와 하는 이야기를 커튼 속에 숨어 듣게 되었습니다.
햄릿은 어떻게 아버지를 죽인 숙부와 결혼할 수 있느냐고 따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커튼에서 부스럭하는 소리를 듣고는 칼로 찔러버립니다.
오필리아의 아버지는 그렇게 죽습니다.
이 소식을 들은 오필리아는 스스로 목숨을 끊습니다. 플로니어스의 아들이자 오필리아의 오빠인 레어티스는 왕 클로디어스와 짜고 햄릿을 죽여 복수하려 합니다.
검술 시합에서 칼에 독을 발라 죽이려 한 것입니다.
그러나 검술 시합에서 햄릿이 레어티스를 압도합니다. 이에 불안을 느낀 왕은 포도주에 독을 타서 햄릿에게 마시라고 건넵니다.
그러나 햄릿의 땀을 닦아주는 왕비가 마시고 쓰러집니다.
술에 독을 탄 사실을 안 햄릿은 왕을 찔러 죽입니다.
레어티스도 상처가 심해 죽습니다.
햄릿도 독이 든 칼에 상처를 입은 터라 서서히 죽어갑니다.
처음에 선왕의 유령을 보았다고 알려준 햄릿의 친구 호레이쇼도 자책하며 죽으려 합니다.
햄릿은 죽어가며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나는 죽네, 호레이쇼. 아, 내가 진실을 말해줄 수 있으련만, 그럴 수 없는 상황이오.
이 모진 세상에서 고통의 숨결을 지속하며 내 이야기를 전해주게.”
“죽느냐, 사느냐 이것이 문제로다!”라는 유명한 대사. 이것은 우유부단함과 결정 장애의 극치를 표현한 말입니다.
왜 죽어야 하는지, 살아야 하는지 결정하지 못하게 된 것일까요? 단 두 가지의 경우만 놓고 결정하면 좋은데 자신도 모르게 수많은 선택지를 놓아버리게 된 것입니다.
결정 장애의 원인은 선택지가 많아지는 데 있습니다.
어느 식료품점에서 매일 무료 잼 시식 행사를 열었습니다.
어떤 날에는 여섯 가지 잼이 진열되었고 어떤 날에는 스물네 가지 잼이 진열되었습니다.
과연 어느 경우에 잼이 더 많이 팔렸을까요? 바로 여섯 가지만 진열된 경우였습니다.
스물네 가지를 진열했을 때보다 여섯 가지만 진열했을 경우 잼을 구입할 확률이 무려 열 배나 높았습니다.
왜 더 많은 선택지가 주어졌을 때 구매할 확률이 줄어드는 것일까요?
왜냐하면 그중에 하나를 선택하기 어렵기 때문입니다.
또 하나를 선택할 때 잃어야 하는 선택지가 너무 마음이 아픈 것입니다.
여섯 가지만 있으면 다섯 가지만 못 먹는 아픔이 있지만, 스물네 가지가 있다면 스물세 가지의 잼을 먹지 못하는 고통을 감수해야 합니다.
그렇다면 만약 사탄이 자신이 제외당하지 않게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사람들의 선택권을 많게 하는 방법이 가장 좋습니다.
너무 선택지가 많아서 주저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선과 악, 빛과 어둠, 천국과 지옥으로 명확히 둘만 구분하십니다.
둘 중의 하나만 선택하게 하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오늘 번역을 보십시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베드로에게 “사탄아, 내게서 물러가라.
너는 나에게 걸림돌이다.
너는 하느님의 일은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 생각하는구나!”(마태 16,23)라고 하십니다.
여기서 “사람의 일만” 생각한다고 할 때, 사람의 일을 생각하며 가끔은 하느님의 일도 생각해 줘야 한다는 식으로 들립니다.
하지만 실제로는 이렇게 번역되어야 옳습니다.
“너는 하느님의 일을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구나!”
하느님의 일과 사람의 일은 반대됩니다.
선택지는 단 두 개밖에 없습니다.
하느님의 일을 생각하면 하느님의 자녀이고 사람의 일을 생각하면 사탄이 됩니다.
그러나 사람의 일과 하느님의 일의 구분을 모호하게 만듦으로써 사람의 일이 무엇인지, 하느님의 일이 무엇인지 헛갈리게 만듭니다.
사람의 일을 도모하면서도 가끔 하느님의 뜻도 생각하면 된다는 식입니다.
이렇게 사람의 일을 선택해도 된다는 식으로 번역을 한 것입니다.
하지만 사람의 일이란 무엇입니까? 탐욕과 쾌락과 명예를 추구하는 일입니다.
하느님의 일은 이것과 반대되어 청빈해지고 절제하고 겸손하게 순종하는 일입니다.
하느님의 일과 사람의 일을 혼동시키는 번역은 옳지 않습니다.
인간은 하느님의 일을 하지 않으면 그 자체로 사탄이 되기로 예정되어 있었습니다.
우리 선택은 단 두 개밖에 없습니다.
인생은 답이 없다느니, 이원론에서 벗어나야 한다느니 하는 말은 듣지 마십시오.
결정 장애에 빠져 무엇이 하느님 뜻인지, 무엇이 사탄의 뜻인지도 구분하지 못하게 될 것입니다.
선택하려면 선택지를 단 두 개로 좁힐 필요가 있습니다.
“죽느냐, 사느냐?”
‘범죄도시 2’에서 범인은 20억이 든 가방을 들고 마 형사와 마주칩니다. 이때 제안합니다.
“5대5로 나눌까?” 마 형사는 묻습니다. “누가 5야?”
범인은 당황합니다.
마 형사는 그럴 생각이 없었습니다.
그냥 잡으려고 한 거죠.
선택권이 많아지는 것을 허락하지 않습니다. 순수한 어린이와 같습니다. 관객은 이런 것을 좋아합니다.
“넌 안 되겠어. 넌 좀 맞아야 해. 맞다가 죽을 거 같으면 벨 눌러. 내리게 해 줄 게.”
햄릿 증후군과 반대되는 상황이 ‘돈키호테’입니다. 돈키호테는 결정론자입니다.
자신이 기사라고 믿으니 그냥 기사로 삽니다. 당시는 기사는 사라진 시대였습니다.
그리고 술집 여자를 공주로 여깁니다.
그런데 이 믿음이 술집 여자 알돈자를 회개시킵니다.
둘시네아가 되게 합니다.
이를 위해 풍차와도 싸웁니다.
바보도 이런 바보가 없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어떤 믿음을 가진 자를 원하실까요?
하느님을 믿기는 하지만 숙부가 천국에 갈까 봐 기도할 때 죽이지 못하는 햄릿일까요,
아니면 사랑을 위해 목숨을 바치는 바보 기사를 원하실까요?
어린이처럼 되기를 원하십니다.
어린이들은 단순합니다.
세속-육신-마귀에 물들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복잡해서 뭐가 좋을까요? 삶에 답이 없어지는 이유는, ‘욕심’ 때문에 선택지가 많아지기 때문입니다.
그러며 ‘신중’하다고 자기를 높게 평가합니다.
베드로도 그랬습니다. 사탄이 됩니다.
어린이처럼 천국과 지옥, 빛과 어둠, 이렇게 ‘극단적 이원론’을 놓고 선택합시다.
극단적 이원론을 두려워하는 이들은 자신들의 욕심이 탄로 날까 봐 두려워하기 때문입니다.
단순하게 해답을 가지고 삽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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