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 13,31-33ㄱ.34-35
그냥 사랑하면 되는데, 왜 굳이 예수님 말씀 때문에 사랑해야 하는가?
오늘 복음도 역시 요한복음이 성찬례를 제정하신 성목요일에 관해 설명하는 대목입니다.
특별히 오늘은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란 계명을 주십니다.
그런데 우리는 서로 사랑해야 하는 이 계명을 이미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왜 꼭 예수님의 명령에 순종해야만 하는 것일까요?
우선 사랑은 왜 해야 하는지 알아야 합니다.
요한복음은 우리가 ‘기쁨으로 충만’하기 위해 예수님께서 이러한 계명을 주신다고 하십니다.
행복을 크게 두 가지로 나뉩니다. 소유하는 행복과 사랑하는 행복입니다.
소유하고 싶은 욕망을 충족시켜 주는 행복은 허무하게 빨리 끝나고, 서로 사랑하는 관계로 얻는 행복은 오래갑니다.
워런 버핏은 돈은 좋은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 버는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소유하는 목적이 관계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버드 대학에서 75년간 한 연구에서 ‘행복은 관계’라고 결론 내렸습니다. 따라서 사랑의 관계, 그 관계 안에 소속되는 기쁨이 이 지상에 존재하는 가장 완전한 행복임은 누구도 부인할 수 없습니다.
관계가 해소해주는 인간의 욕망은 ‘소속감’입니다. 이 소속감은 생존과 직결됩니다.
하리 핼로우의 격리 원숭이 실험에서 원숭이는 젖을 주는 어미보다 따듯한 어미를 선택했습니다.
젖은 짧은 행복을 주지만, 따듯한 어미는 소속감을 줍니다.
그 소속감이 자신을 더 오래 생존시켜줄 것임을 아는 것입니다.
하지만 관계를 맺으려면 ‘사랑’이라는 계명을 지켜야 합니다.
모든 공동체 안엔 그 공동체에서 요구하는 최소한의 사랑의 능력이 있습니다.
우리 각자는 그 명령을 따르며 그 공동체에 속해있습니다.
가정보다는 사회가 그 사랑의 정도가 약하겠고, 사회보다는 교도소가 더 약할 것입니다.
물론 교도소보다는 동물의 무리가 사랑의 정도가 더 약합니다.
우리 각자는 공동체에 머물기 위해 그 공동체에서 요구하는 사랑의 명령을 따르고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인간의 명령은 언제나 ‘피조물의 수준’의 사랑에 불과합니다. 다시 말해 이기적이라는 것입니다.
내가 사람이라 믿으며 사랑하라고 하면 이 명령을 따르는 사람은 사람의 수준만큼밖에 사랑하지 못합니다.
박수홍 씨는 현재 형과 100억 가까이 소송을 하고 있습니다.
일각에서는 이렇게 된 데에 어머니의 영향이 컸을 것으로 추측하고 있습니다.
어머니는 박수홍 씨에게 가족을 먼저 생각하도록 교육하였습니다. 어머니가 박수홍 씨에게
가족 사랑을 강조했지만 그건 실제로 박수홍 씨의 결혼까지도 반대하는 문제를 낳았습니다.
박수홍 씨는 가족의 반대가 자기 팔 한쪽을 끊어내는 고통이었다고 눈물을 흘리며 말한 적이 있습니다.
가족을 사랑하여 가족 안에서의 소속감을 느끼던지, 자유로워하고 싶으면 그 사랑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박수홍 씨는 그러지 못했습니다. 가족에게 충분한 사랑을 받지 못하는 것을 알면서도 가족이 전부였습니다.
한 번은 어머니가 해 준 카레가 맛있다고 했다가 어머니가 일주일 내내 카레를 해 주어서 투정을 부렸다고 합니다.
엄마는 돈 번다고 유세하느냐며 3일을 단식투쟁하였고 결국엔 박수홍 씨가 무릎을 꿇고 빌었다는 것입니다.
가족의 소속감을 담보로 어쩌면 자녀를 이용하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유튜브에 보니 ‘딸 같은 며느리 원하는 박수홍 엄마에게 돌직구 날려버린 박명수’란 제목이 있었습니다.
부모는 자녀를 독립시켜 잘 살게 하는 목적으로 자녀를 키워야 합니다.
하지만 박수홍 씨 어머니는 아들이 딸처럼 자신에게 잘해주는 며느리를 아들을 통해 얻고 싶었습니다.
거기 출연한 어머니들은 대부분 같은 생각이었습니다. 자신의 아이들은 나이가 들었어도 아기를 낳을 수 있는 젊은 며느리를 원했고, 딸처럼 딸이 없는 자신을 위로해 줄 수 있는 사람이었으면 좋겠다고 말합니다.
박명수 씨는 딸 같은 며느리는 만들 수 없다고 못을 박으니 거기 나온 어머니들의 표정이 안 좋아졌습니다.
이상민 씨의 어머니는 “아니야, 그렇게 만들어야 해!”라며 단호하게 말했고, 다른 사람은 안 돼도 나는 만들 수 있다며 자신감을 내비쳤습니다.
그리고 계속 그렇게는 안 된다고 말하는 박명수 씨에게 “지금은 시엄마들이 잘하면 따라오게 돼 있어요!”라고 했습니다.
자신의 가정에 속하려면 자신의 사랑의 수준까지는 올라와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요구하는 사랑이 진정 사랑일까요? 인간도 피조물입니다.
인간이 요구하는 사랑 안에는 반드시 피조물의 생존욕구가 스며들어 있습니다.
그 사랑의 명령을 따르다가는 피를 빨립니다.
같은 사랑하라는 명령이라도 인간의 명령을 따를 때는 주의가 필요합니다.
어른이 되었다면 이제 사람이 사랑하라고 해서 사랑해서는 안 됩니다.
그래봐야 사람의 공동체에 속할 수밖에 없습니다.
오히려 그 공동체 안에 갇힐 뿐입니다. 다 자신처럼 만들려고 하는 명령 일부분일 뿐입니다.
하느님만이 사랑이십니다. 사랑의 본성은 창조자만이 지닌 특권입니다.
창조자는 사랑하라는 명령으로 인간을 창조자로 만들려는 것이고, 인간은 사랑하라는 명령으로 인간을 자신처럼 만들려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명령이기 때문에 사랑하십시오.
그래야 하느님처럼 됩니다.
그래야 하느님 가족으로 살 수 있습니다.
아무리 사랑하라는 명령이라도 누구나 자신처럼 만들기 위해 명령하는 것입니다.
그 명령을 따르면 그 사람처럼 됩니다. 명령은 다 자기 이익을 위해 내리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명령을 따르는 사람은 그 명령하는 사람처럼 됩니다.
명령안에는 의도가 있습니다. 의도가 명령보다 큽니다. 누군가 그 명령을 따를 때 그 명령하는 사람의 의도에 사로잡힙니다.
의도는 욕구입니다. 욕구는 본성입니다.
그러니 내가 하는 모든 명령은 다 누군가를 나의 욕구를 채우거나 나의 욕구대로 만들려는 틀 안에 갇혀있습니다.
그 명령을 따를 때 그 사람처럼 되는 것입니다.
밀링거 대주교가 있습니다. 그는 지금 사제들을 서품하고 자신만의 교구를 만들고
가톨릭 주교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는 파문당한 사람입니다.
우리나라의 성 마리아란 여인과 통일교식으로 결혼하였습니다.
그리고 서로 사랑하라는 그리스도의 명령을 전파하는 주교로 살았습니다.
여러 사제가 밀링거에 의해 주교와 사제로 서품되고 사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교회는 곧 그리스도의 대리자입니다.
교회의 명령을 어기는 것은 그리스도의 명을 어기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명을 어기며 서로 사랑하라고 말하는 사람의 말을 따르면 어떻게 될까요?
그리스도처럼 사랑하게 될까요? 아닙니다. 밀링거 대주교가 사랑한 방식으로 사랑하게 됩니다.
모든 명령안에는 ‘나처럼’이 들어있습니다.
결국 밀링거를 통해 사랑하라는 주님의 명령을 받더라도 밀링거의 공동체에 속하게 되는 것이지 하느님의 공동체에 속하지는 못합니다.
자신이 하느님이라 믿는 이가 사랑하라는 말에 순종하십시오.
그래야 그 공동체에 속하고 되고 그 본성에 참여하게 됩니다. 늑대가 인간 아기에게 명령한다고 생각해봅시다.
그 모든 명령을 다 따라도 아기는 늑대처럼만 됩니다. 늑대도 사랑하라고 합니다.
하지만 그 사랑은 늑대의 본성에 한정됩니다. 인간이 사랑하라는 것도 마찬가집니다.
우리는 사랑하라는 말도 하느님의 명령을 따라야 합니다.
그래야 하느님처럼 영원한 생명을 누리는 본성이 됩니다.
예수님은 하느님이십니다.
그분은 우리 발을 씻기시며 이렇게 명령하십니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요한 13,34)
여기서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이 더 중요한 부분입니다. 그분처럼 사랑해야 그분의 명령을 따르는 것입니다.
사랑하라는 계명을 따르는 이유는 그 공동체에 속하고 싶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하느님으로 친구의 발을 씻어주는 사랑을 하셨습니다.
우리가 성체를 영하는 이유는 하느님으로서 사랑하기 위함입니다.
누구나 자기 본성만큼 사랑합니다
내가 하느님이 되었다고 믿고 사랑하려면 인간이 아닌 하느님의 사랑하라는 명령을 따라야 합니다.
그래야 그분 안에 머물고 그분처럼 될 수 있습니다.
하느님이시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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