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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묵상

4월 26일 _ 전삼용 요셉 신부

작성자 : 홍보실 작성일 : 2022-04-26 조회수 : 1771

빛이 되기 위해 살지 말고, 빛임을 증명하기 위해 살라! 
 
 
예수님은 밤에 당신을 찾아온 니코데모에게 “너희는 위로부터 태어나야 한다”(요한 3,7)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 위에는 ‘하늘’이 있습니다.
그러니 ‘하늘로부터’ 새로 태어나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태어날 때 갖는 것을 ‘본성’이라고 합니다.
새로 태어나야 한다는 말은 ‘새로운 본성’을 가져야 함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요한복음에서는 본성은 크게 둘로 나뉩니다.
바로 빛의 본성과 어둠의 본성입니다.
빛의 본성은 하늘의 본성이고 어둠의 본성은 땅의 본성입니다.
빛의 본성은 창조자 하느님의 본성이고 어둠의 본성은 피조물의 본성입니다.  
 
본성을 알아보는 방법은 ‘욕구’를 통해서입니다. 피조물의 욕구가 있고 창조자의 욕구가 있습니다.
피조물의 욕구는 이 세상에서의 생존이고 창조자의 욕구는 사랑입니다.
사랑은 피조물의 생존 욕구와 대치됩니다.  
 
예수님은 이 욕구를 변화시키는 방법이 ‘십자가’라고 말씀하십니다.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들어 올린 것처럼, 사람의 아들도 들어 올려져야 한다.
믿는 사람은 누구나 사람의 아들 안에서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려는 것이다.”(요한 3,14-15) 
 
하늘의 본성을 가진 이가 땅의 본성을 끌어올리려면 십자가에 죽는 수밖에 없습니다. 
다행히 우리는 ‘짐승 – 인간 – 하느님’의 세 단계로 탄생하기 때문에 인간이 어떻게 하느님의 본성으로 탄생하는지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내가 세상일을 말하여도 너희가 믿지 않는데, 하물며 하늘 일을 말하면 어찌 믿겠느냐?”(요한 3,12) 라고 하시는 이유는 세상에서도 새로 태어남이 존재한다는 뜻입니다.  
 
이 새로 태어남은 동물의 본성으로 태어나서 인간의 본성으로 새로 태어나는 과정을 말합니다.
이때 부모는 하늘입니다.
하늘은 자녀들을 인간으로 만들기 위해 십자가의 고통을 당합니다.
자녀를 키워본 사람이라면 십자가의 희생이 아니면 자녀들이 어른으로 성장할 수 없음을 잘 압니다.
하지만 인간도 여전히 피조물이라 생존 욕구의 노예일 뿐입니다.  
 
그런데 가끔은 인간 스스로 신적인 존재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불교의 교리가 그렇습니다.
인간이 부처가 된다는 말은 인간이 노력하면 스스로 신적인 본성으로 승화할 수 있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아기가 부모 없이 인간이 될 수 있다는 말과 같습니다. 
 
그러나 본성은 본성에서만 나옵니다. 인간의 본성은 인간에게서 나오고 동물의 본성은 동물에게서, 그리고 하느님의 본성은 하느님에게서만 나옵니다.
하느님 없이 하느님이 될 수 없습니다.
인간의 본성을 지닌 이가 먼저 존재하지 않으면 어떤 방법을 통해서도 인간이 되는 일은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빛이시고 그 본성이 하느님이신 이유는 인간 안에 사랑의 욕구를 심어주시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사랑은 동물의 본성이 아닙니다.
동물도 그 사랑의 수준이 있습니다.
사랑이 있는 동물은 무리생활이 가능해집니다.
그러나 일정 기간 부모에 의해 사랑을 배우는 시간이 필요합니다.
이 시간에는 자신이 부모와 같은 본성이기 때문에 부모처럼 할 수 있다는 믿음이 지배하는 시기입니다.
그분이 나의 부모이고 내가 부모처럼, 부모가 원하는 대로 할 수 있다고 믿지 못하면 본성은 변하지 않습니다. 
 
새로운 본성으로 태어나는 방식은 내가 그 새로운 본성임을 증명하는 삶을 통해서입니다.
누구나 매일매일 자신의 본성이 무엇인지 증명하며 삽니다.  
 
예수님만이 유일한 창조자시라는 이유는 사랑이란 본성은 내가 창조자 하느님이라는 믿음이 아니면 나올 수 없기 때문입니다. 피조물에서는 사랑의 본성이 나오지 않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사랑은 피조물 안에 넣어진 작은 사랑이 아닙니다.
이웃을 위해 생명을 바치는 사랑입니다.
어떤 동물도 동료를 위해 대신 자기 생명을 바치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이태석 신부처럼 심지어 몰랐던 이들을 위해서도 생명을 바칠 수 있는 게 하느님으로 새로 태어난 인간입니다.  
 
이렇게 그리스도께서 하느님이심을 드러나는 것이고, 하느님이시기에 죽지 않으심이 드러나는 것입니다.
우리도 이웃을 새로 태어나게 하려고 십자가를 지고 있다면 창조자의 본성으로 올라오는 중인 것입니다.
사랑은 사랑으로만 태어납니다.
빛은 빛으로만 태어납니다.
이 세상의 유일한 빛은 하늘에서 오신 그리스도입니다.  
 
내가 빛일까요? 그러면 빛임을 증명하고 있을 것입니다.
최근 애플 TV에서 발매한 드라마 ‘파친코’에서 이 장면이 기억에 많이 남습니다. 
 
선자는 어쩔 수 없는 상황에서 목사와 결혼하여 부산에서 일본으로 건너가 사는 할머니입니다.
선자의 손자는 솔로몬입니다.
솔로몬은 미국의 잘 나가는 회사 직원이었으나 승진에서 제외당합니다.  
 
그런데 일본 지사에 좋은 일거리가 있습니다. 한국계 할머니가 그들이 건물을 지으려는 땅에 알박기하는 것입니다.
솔로몬은 자신이 그 일을 해결하고 오면 부사장 자리를 내어달라는 약속을 하고 일본에 건너옵니다.
솔로몬은 할머니에게 10억 엔을 주겠으니 집을 팔라고 합니다.
할머니는 막무가내입니다.  
 
그러자 솔로몬은 지혜를 냅니다.
바로 자기 할머니 선자를 그 할머니와 만나게 해 주는 것입니다.
이것이 통했습니다.
그래서 할머니는 은행에 사인하러 옵니다.
일본인들은 깊은 인사를 하며 겉으로는 할머니를 공경하는 척합니다.
그러나 시선은 매우 따갑습니다.  
 
솔로몬은 할머니에게 기쁜 얼굴로 말합니다. 
“할머니가 이겼어요. 오늘 대대손손 물려줄 큰돈이 생기는 거니까요. 오늘 내 할머니가 뭐 하시는지 아세요?
고향 떠나시고 처음으로 한국 가세요. 50년 전 여기 오실 때는 빈손으로 오셨는데 오늘은 일등석 타고 가신다고요.” 
 
그러나 할머니는 계약서 내용을 꼼꼼히 훑어봅니다.
그러자 처음에 친절했던 일본 사람들 눈빛이 바뀝니다. 어떤 임원이 이렇게 말합니다. 
“어머님, 이 중요한 사람들을 다 기다리게 하고 계세요.” 
 
할머니가 여기서 사인하면, 그냥 돈 많이 벌려고 알박기하려던 한 조선족이 될 뿐이었습니다.
할머니는 사인하려던 펜을 멈추고 유일한 한국 혈통인 솔로몬을 바라보며 이렇게 한국말로 말합니다.  
 
“처음 왔을 때 일본 사람들은 우리에게 집을 내어주지 않았다.
우리를 바퀴벌레라고 불렀지.
잘 생각해 봐.
그게 너한테 하는 얘기니까. 어디 한 번 들어보자. 네 할머니가 저 히죽대는 면상들 쳐다보며 여기 앉아 계시는데 그 몸속에 한 맺힌 피가 그 핏방울 하나하나가 이걸 못 하게 막는다 하면 뭐라 말씀드릴 거야? 그래도 사인하라고 하겠니?” 
 
솔로몬은 눈빛이 바뀌며 이렇게 말합니다. 
“하지 마세요. 그렇게 말씀드렸을 거예요. 하지 마시라고.” 
 
솔로몬은 회사에서 잘립니다.
그런데 넥타이를 풀어 헤친 솔로몬은 비를 맞으며 길거리 버스커들의 음악에 몸을 맡깁니다.
정체성을 찾은 자유의 행복을 만끽하는 것입니다.  
 
우리에게는 어둠에 머물러 있게 만드는 본성이 있고 자신이 누구인지 증명하고 싶은 욕망도 있습니다.
참 자유는 내가 하느님임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런 행동이 나옵니다.
또 그렇게 하루하루 하느님의 본성에 가까워집니다. 
 
누구나 자신이 누구인지 증명하며 삽니다.
이것이 영원한 생명에 이르게 하는 믿음이고 요한 복음이 줄기차게 말하는 믿음입니다.  
 
나는 내가 사람임을 증명하며 삽니까, 하느님임을 증명하며 삽니까?
그리스도임을 증명하며 삽시다.
그래야 조금씩 어둠에서 빛으로 나아갑니다. 
 
빛이 되려 하지 말고, 이미 빛임을 믿고 증명하기 위해 살아야 합니다.
우리 핏속엔 이미 하느님의 핏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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