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은 무엇을 위해서가 아니라 누구를 위해서 살 때 의미 있다
오늘 복음은 예수님께서 세 번째 제자들에게 나타나신 장면입니다.
첫 번째는 토마스가 없는 가운데 나타나셨고, 두 번째는 토마스가 돌아왔을 때 나타나셨습니다.
지금 세 번째에는 제자들이 갈릴래아 호수에서 물고기를 잡고 있었습니다.
밤새 잡았지만 한 마리도 잡지 못했습니다.
빛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새벽이 되자 목소리가 들렸습니다.
“그물을 배 오른쪽에 던져라.”(요한 21,6)
오른쪽은 ‘의식’을 상징합니다.
의식적으로 순종하라는 뜻입니다.
그랬더니 ‘백쉰세 마리’나 잡혔습니다.
숫자 ‘153’은 히브리어 ‘하느님의 자녀들’(베니 하엘로힘)을 의미하기도 하고 ‘파스카’(하파사크)의 숫자 값이기도 합니다.
배에는 일곱 명이 타고 있었는데, ‘7’은 성령을 상징하기도 하고 창조를 상징하며 칠성사를 상징하기도 합니다.
이 칠성사, 곧 새로운 창조가 이루어지는 배는 곧 교회를 상징합니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말씀에 순종하여 그물을 던지고 하느님의 자녀들을 탄생시킵니다.
요한복음에서 하느님의 자녀는 어떤 사람일까요? 물과 성령으로 새로 태어난 사람입니다.
하느님을 아버지로 여기는 사람입니다.
물론 이스라엘 백성도 하느님을 아버지라 여기고 있었습니다.
“우리는 사생아가 아니오. 우리 아버지는 오직 한 분, 하느님이시오.”(요한 8,41)
그러나 그들이 아무리 하느님을 아버지라 불러도 그들은 살인자였습니다.
왜냐하면 자신이 하느님이라 믿을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하느님의 자녀는 자신을 하느님과 대등하게 만드는 사람이라 말씀하십니다.
이들은 그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습니다.
“좋은 일을 하였기 때문이 아니라 하느님을 모독하였기 때문에 당신에게 돌을 던지려는 것이오.
당신은 사람이면서 하느님으로 자처하고 있소.”(요한 10,33)
하느님으로 자처하고 있는 것이 곧 하느님의 자녀입니다.
하느님은 당신 아드님을 밀가루 안에 넣어 밀가루도 하느님으로 만드시는 분이십니다.
성체를 말합니다. 하물며 당신 모습대로 창조하신 인간을 하느님으로 만드실 수 없으시겠습니까?
말씀이신 그리스도를 받아들인 이는 모두 하느님의 자녀, 곧 하느님이 됩니다.
“너희 율법에 ‘내가 이르건대 너희는 신이다’라고 기록되어 있지 않으냐?
폐기될 수 없는 성경에서, 하느님의 말씀을 받은 이들을 신이라고 하였는데, 아버지께서 거룩하게 하시어 이 세상에 보내신 내가 ‘나는 하느님의 아들이다’ 하였다 해서, ‘당신은 하느님을 모독하고 있소’ 하고 말할 수 있느냐?”(요한 10,34-36)
여기서 말씀을 받아들인 이들을 하느님이라 했다고 해서 예수님께서 잘못되었다고 하시는 말씀이 아닙니다.
오히려 왜 사람이 신이 될 수 없다고 말하냐고 하시는 것입니다.
교리서도 “‘말씀’은 우리를 ‘하느님의 본성에 참여하게’(2베드 1,4) 하시려고 사람이 되셨고”,
“우리를 하느님이 되게 하시려고 (그리스도께서) 인간이 되셨습니다”(CCC, 460)라고 말하고,
사제란 이 믿음을 전해주는 역할을 하는 사람이라 말합니다.
사제란 먼저 자신이 “하느님이 될 것이고 다른 이를 하느님이 되게”(CCC, 1589) 하는 존재입니다.
이것이 성경과 교리의 가르침입니다.
저는 저 자신이 하느님이라 고백할 수 있었을 때 많은 죄에서 벗어날 수 있었음을 체험하였습니다.
아무리 하느님을 믿어도 벗어날 수 없는 죄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내가 나를 하느님으로 믿을 때 그런 욕망에서 자유로워집니다.
욕구는 자신의 정체성, 곧 자신이 누구냐는 믿음에서 비롯됩니다.
개라고 믿으면 네 발로 걷고 싶은 욕구가 나오고, 사람이면 두 발로, 하느님의 자녀라면 물 위를 걷고 싶은 욕구가 나옵니다.
이는 성체가 그리스도이시고 그 성체를 영한 우리도 그리스도, 곧 본성상 하느님이 되었다고 믿을 때 가능합니다.
하지만 이것을 깨닫고 책을 내었지만, 너무 많은 반대에 부딪혔음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것이 현실입니다.
“하느님을 아버지라 믿는 여러분들은 주님 앞에서 사람이라고 말할 것입니까,
아니면 하느님이라 말할 것입니까?”라고 물어보면 거의 100% 다 인간이라고 대답할 것이라 말합니다.
그것이 겸손해 보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 믿음은 하느님 부모님이 주신 것이 아니라 인간 부모님이 주신 믿음입니다.
성당을 다니면서도 꼭 가져야 하는 믿음을 거부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거의 아무도 이 믿음을 받아들이려 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저는 혼자 그물을 던졌습니다.
그것이 밤이었음을 몰랐기 때문입니다.
제가 책을 낸 것은 제 의지로 냈던 것입니다. 그렇게 밤새 노력했지만 아무도 믿어주지 않았고
헛수고만 한다는 생각으로 힘이 빠져있었습니다.
이때 코로나가 터졌습니다.
하던 일들을 다 멈추고 나니 무엇을 해야 할지 몰랐습니다.
성체 앞에서 기도를 드렸습니다.
유튜브를 시작하라는 강한 열망이 솟았습니다.
그러나 저는 유튜브 채널조차 만들지 못하는 거의 컴맹 수준이었습니다.
그래서 아는 분들에게 도움을 구했더니 생각보다 유튜브를 어렵게 여기고 있었습니다.
팀을 꾸려서 녹화하게 도와주겠다는 것입니다.
저는 그것은 아니라 생각하고 유튜브를 보며 채널을 만들고 그냥 복음 묵상을 올려보았습니다.
처음엔 카메라를 보면서 하는 게 매우 어색하였습니다.
카메라를 봐야 하는지 모니터를 봐야 하는지 몰랐습니다.
많은 조언을 들었고 그렇게 조금씩 발전해갔습니다.
물론 나의 동영상을 보는 분들의 숫자에 관심을 가지지 않으려 했습니다.
그런데도 관심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백쉰세 마리란 숫자에 관심을 가진 것입니다.
그런데 베드로에게 행복은 물고기에 있지 않았습니다.
자신이 순종하여 열매를 맺게 해 준 부활하신 그리스도께 있었습니다.
사실 베드로가 그리스도를 부활시키고 있는 것입니다.
베드로가 고집을 부리고 그물을 내리지 않았다면 예수님은 그에게 부활하신 분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나에게 부활하신 분이 되려면 내가 물고기가 아닌 그분을 위해서 그물을 던지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이것이 우리에게 그리스도를 만날 때 입을 겉옷을 선물합니다.
그리스도를 부활시키는 것이 그분의 가죽옷을 입은 우리의 소명입니다.
영화 ‘레이스’(2016)는 미국에서는 흑인 차별, 독일에서는 유색인 차별이 심했던 1930년대
이 모든 것을 이겨내고 베를린 올림픽 4관왕에 오른 제시 오언의 이야기입니다.
제시는 자녀까지 있는 아버지였습니다.
그는 ‘래리’라는 코치를 보고 대학에 입학합니다.
래리는 제시의 능력을 보고 잘 가르쳐 세계 신기록을 갈아치웁니다.
이렇게 제시가 유명해지자 그를 유혹하는 여인도 많았습니다.
그런 모습이 신문에 나자 제시의 애인은 결혼이고 뭐고 다 취소라고 다시는 찾아오지 말라고 합니다.
그 이후로 이상하리만큼 실력이 나오지 않았습니다.
래리는 제시가 올바른 길을 가도록 도와줍니다.
제시는 애인과 사람들 앞에서 겸손하게 사과하고 청혼하여 결혼합니다.
베를린 올림픽 때 히틀러는 흑인과 유대인은 경기에 뛰지 못하게 하려고 했습니다.
특별히 유대인은 뛰지 못하게 했습니다. 여러 가지 정신적으로 혼란한 제시를 돕기 위해 래리는 사비를 털어서 베를린으로 옵니다.
이 사실을 안 제시는 래리를 코치로 함께 연습하게 해주지 않으면 경기를 뛰지 않겠다고 말해서
자신의 스승을 높여줍니다.
그리고 함께 모든 역경을 뛰어넘고 금메달을 네 개나 따게 된 것입니다.
제시는 처음에 기록에 목적을 두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관계가 흐트러지고 결국 기록도 하강하게 되었습니다.
아내를 위해 뛰기로 다시 결심한 순간부터 다시 기록이 좋아졌습니다.
이때 아마도 목표가 아니라 자신을 위해 희생한 이들을 위해 뛰어야 함을 깨달은 것 같습니다.
그래서 자신을 끝까지 믿어준 코치 래리를 위해 뛸 줄도 알았습니다.
사람은 목표를 위해서가 아니라 사람을 위해 뛰어야 합니다. 특히 나를 위해 희생해준 사람을 위해 뛰어야 합니다.
그렇게 그 사람을 부활시키는 것입니다.
그러다 보면 기록도 좋아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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