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와 동행하는 예수님은 부활하신 예수님인가?
오늘 복음은 마리아 막달레나가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는 장면입니다.
요한복음엔 이 순간이 무덤이 아닌 ‘정원’에서 이루어진다고 말합니다.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하고 ‘정원지기’라고 여기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정원은 단순한 정원이 아닙니다. 바로 에덴동산을 상징합니다.
에덴동산은 생존에 대한 문제, 심지어 죽음에 대한 문제도 해결된 곳입니다.
계속 설명해 왔지만, 사람이 악해지는 것은 생존에 대한 문제에 집착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다는 것은 곧 죽음까지도 걱정할 필요가 없는 에덴동산에 들어간다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니 동산지기입니다.
에덴동산에서 동산지기는 아담이었습니다. 요한은 의도적으로 이 창세기의 이야기를 하는 것입니다.
새로운 아담이신 그리스도는 한 여인을 “마리아야!”라는 이름으로 부르십니다.
요한복음에서는 성모님조차 마리아란 이름을 쓰지 않습니다.
이 순간을 위해 참아온 것입니다.
아담은 동물처럼 살고 있었던 마리아 막달레나에게 아버지가 누구인지 알려주며 새로운 존재라는 믿음을 갖게 합니다.
예수님께서 알려주시는 그 아버지는 곧 우리의 아버지입니다.
다시 말해 아버지에게서 나온 예수님도 하느님이 되시는 것이고, 마찬가지로 그분을 아버지로 부르는 우리도 하느님이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당신 소명을 마리아에게 넘겨줍니다.
새로 태어난 이는 마치 부활하신 예수님처러 누군가에게 에덴동산이 되어주는 것입니다.
“내 형제들에게 가서, ‘나는 내 아버지시며 너희의 아버지신 분, 내 하느님이시며 너희의 하느님이신 분께 올라간다.’ 하고 전하여라.”(요한 20,17)
마리아 막달레나는 이제 부활하신 예수님과 동행하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죽음도 두렵지 않습니다.
제자들에게 달려가서 “제가 주님을 뵈었습니다”라고 말합니다.
이것이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 동행하는 그리스도인의 마음입니다.
부활을 믿으면 그래서 두려움이 없어야 합니다.
예수님은 당신 살과 피로 우리 안에 들어오셔서 우리와 함께하십니다.
그런데 가끔 보면 우리와 동행하시는 예수님께서 부활하지 못하신 분 같기도 합니다.
우리가 그분이 모든 것을 책임지지 못하실 분처럼 두려워하며 세상 것에 다시 집착하게 되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그분은 당신이 부활하셨음을 우리가 믿게 하려고 우리가 가진 모든 것을 다 포기할 줄 알기를 기다리십니다.
유기성 목사는 부활하신 예수님과 동행함을 믿으려면 내가 죽었음을 믿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그분이 생명이시기에 내가 죽었다고 믿어도 됩니다.
그리고 그렇게 믿을 때 그분의 부활이 더 명확히 믿어진다고 합니다.
군종 목사가 되기 위해 훈련받던 도중 발이 부러집니다.
그것도 모르고 계속 훈련을 받아서 발을 거의 맞출 수 없는 상황이 되었습니다.
의사는 발을 절단해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유 목사는 수원에서 목사로 있던 아버지만을 찾았습니다.
하지만 당시 아버지와 통화가 될 수 없었고, 수술 대기실에서 혼자 마지막 밤을 보내야 했습니다.
유 목사는 울부짖었습니다.
하느님은 찾지 않고 자신의 아버지를 먼저 찾았던 목사로서의 부족한 신앙이 죄책감으로 다가왔습니다.
그렇게 부족한 자신에 비해 하느님의 크신 사랑이 느껴지자 이젠 주님께 자기 발을 바치고 싶어졌습니다.
영원한 생명까지 주실 능력이 있으신 분께 의탁하지 못한 자신이 후회되었고 이젠 제발 자신이 절름발이 목사로 살게 해 달라고 청했습니다.
그러자 마음의 평화가 찾아왔습니다.
결과적으로는 세 번 수술하고 나서 다시 걸을 수 있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사실 우리는 죽음까지 이기신 그분이 나와 함께 계심을 믿지 못하면서 예수님과 동행하고 있다고 착각하기도 합니다.
그다음 시련은 목사가 된 이후 찾아왔습니다. 한 장로님이 불쌍해서 더 많은 기도를 해 주었는데,
신도들 사이에 유 목사가 그 장로에게 돈을 꿔가서 갚지 않아 그렇게 잘해 주는 것이란 소문이 돌았습니다.
그 이전까지는 신도들이 자신을 좋아하는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어떤 분이 더는 유 목사와 함께 할 수 없다며 이 사실을 이야기하자 그때 느낀 배신감과 허무감은 이루 말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더는 목사로서 일할 힘이 없었습니다.
그는 항상 내가 죽고 그리스도로 사는 복음을 선포하고 다녔습니다.
그러나 자신이 죽지 않고 있었음을 깨닫게 됩니다.
부활하신 주님 앞에서 스스로 살려고 했던 것입니다.
눈물을 흘리며 “나는 죽었습니다.
당신 마음을 주소서!”라고 기도했고, 마음 안에서 그리스도의 한없는 아픔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그리스도의 마음은 마냥 기쁘고 행복하신 것이 아니라 찢어지게 아픈 마음으로 이런 모습을 보고 계셨던 것입니다.
이런 시련은 계속 왔습니다.
대학원을 나와야 담임 목사가 되는 것이 당연한 시절 주님은 공부를 좋아하는 마음을 없애고자 논문을 포기하라는 강력한 마음을 주셨습니다.
주위 모든 사람이 그건 잘못된 생각이라 했지만, 마음 안에서 울려오는 목소리가 너무 컸습니다.
고민을 너무 한 탓에 열이 끓어올랐고 몸이 아주 아팠습니다.
이불을 쥐어뜯으며 울었습니다.
석사가 되는 게 뭐라고 그것을 포기하지 못하고 있는 자신이 한심했습니다.
또다시 “나는 죽었습니다. 주님께 의탁합니다”라고 몇 번 기도를 드렸습니다.
그랬더니 한없는 평화가 오고 열이 갑자기 내렸습니다.
유 목사는 석사가 되지 않고도 담임 목사가 될 수 있는 마지막 세대여서 다행히 석사가 없는 거의 유일한 학사 담임 목사가 될 수 있었다고 말합니다.
정말 우리 옆에 동행하시는 그리스도께서 죽음까지 이기신 분임을 우리가 믿는 것은 매우 어렵습니다.
이 믿음은 나의 모든 것, 결국엔 생명까지도 요구하시는 믿음이기 때문입니다.
생명까지도 기꺼이 그분께 봉헌할 수 있을 때 우리와 동행하시는 그분께서 죽음까지 이기신 분임을 증명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아주 작은 것을 잃는 것도 얼마나 두려워합니까?
한 번은 다른 곳에서 강의하고 있는데 아내가 전화로 방금 암 판정받았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강의를 계속하고 싶지 않았습니다. 아내에게 빨리 달려가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마음 안에서 이 모든 것이 주님께서 계획하신 것이고 이것이 지금 자신처럼 마음 아픈 사람들이 와서 앉아 있는데 그들에게 큰 위로의 복음이 될 것이란 믿음이 생겼습니다.
그래서 그 아픔까지도 주님께 바친다는 강의를 했고, 결과적으로 강의도 잘 되고 아내도 수술이 잘 되어 건강해졌습니다.
아내도 덕분에 마음이 편안해졌고 집에 오는 길에
마지막이라 생각하고 많은 이들에게 선교하며 돌아왔다고 합니다.
유기성 목사가 강조하는 것은 ‘주님과 동행하는 삶’입니다.
그런데 주님과 동행하는 삶은 결국 나를 죽이는 삶이었습니다.
왜냐하면 주님은 죽음까지 이기신 부활하신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그분과 동행하기 위해서는 그분의 능력을 인정해야 합니다.
그 인정하는 방법은 내가 모든 것을 잃어도 감사하다는 믿음뿐입니다.
우리는 진정 부활하신 주님과 동행하는가요, 아니면 아직 부활하기 전에 기적을 많이 일으키신
그 예수님과 동행하나요?
부활하신 예수님과 동행하면 그분이 말하지 않아도 맡기기만 하면 다 해 주실 분임을 압니다.
그래서 무엇을 잃을 걱정도 없고 또 무엇을 청할 필요도 없습니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을 이웃에게 전해야 하는 “나는 주님을 만났습니다”라는 것밖에 남지 않습니다.
에덴동산은 바로 부활하신 예수님과의 동행으로 나와 만들어집니다.
요한이 예수님을 동산지기로 표현한 것이 이 이유입니다.
우리가 예수님과 동행할 때 그분 손바닥에서 나 때문에 뚫리신 구멍을 확인합시다.
그 구멍이 있는 것을 본다면 나는 에덴동산에서 사는 하느님의 진정한 자녀입니다.
하지만 아직 구멍이 없다면 나는 아직은 완전한 부활을 체험한 것이 아닙니다.
나와 동행하시는 그분 손의 못 자국을 항상 확인하십시오.
죽음을 이기셨다는 상징입니다.
그리고 나도 죽음을 이기는 사람이 될 것입니다.
신고사유를 간단히 작성해 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