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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묵상

1월 25일 _ 전삼용 요셉 신부

작성자 : 관리자 작성일 : 2022-01-25 조회수 : 1330
1월25일 [성 바오로 사도 회심 축일] 
 
독서 : 사도행전 22,3-16
 
열정이 없는 자는 회개시킬 수 없다
 
오늘은 바오로 사도의 회심 축일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그리스도와의 특별한 만남을 통하여 회심하고 또 그 이후 교회의 최고의 사도가 됩니다.
예수님은 바오로 사도를 교회에 보내셨고, 교회의 대표로 하나니아스가 그에게 세례를 줍니다.
그리고 베드로와 사도단에게 파견받습니다. 
결국, 회개는 교회 공동체에 머물며 교회의 권위에 순종하는 것으로 마무리됩니다. 
교회에 순종하지 않으면 아직 온전히 회개한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우리는 ‘왜 바오로만?’이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왜 나에게 나타나시지 않고 바오로 사도에게는 나타나실까요?
 
회개는 방향을 틀게 만드는 과정입니다.
제가 ‘세속-육신-마귀’를 행복으로 추구하던 방향에서 방향을 틀어 반대로 거스르게 만든 과정이 회개였습니다.
그러니 회개는 ‘행복’과 직결됩니다. 
행복이라고 믿는 방향을 바꾸는 것이 회개입니다. 
 
그런데 바오로는 무엇이 특별해서 하느님께서 회개를 시켜주신 것일까요?
바로 자신이 행복이라고 믿는 것을 위해 직진했다는 데 있습니다.
저도 제가 믿는 행복을 위해 직진했습니다. 
우리는 흐르는 강물 위의 나룻배 위에 탄 사람과 같습니다.
가만히 있으면 나룻배는 바다로 향합니다. 
하지만 노를 젓지 않는다면 방향을 틀어도 마찬가지입니다.
계속 밑으로 내려갑니다. 
하느님은 노를 젓는 사람을 찾으십니다.
하느님은 당신을 미워하는 사람보다 당신께 무관심한 사람을 더 어려워하십니다. 
 
영화 ‘냉정과 열정 사이’(2001)는 ‘냉정과 열정 사이에 미지근함의 지옥이 있다’라는 생각을 하게 만드는 영화입니다. 
피렌체에서 유화 복원사 과정을 수련 중인 쥰세이는 뛰어난 솜씨를 발휘하고 연인 메미와 공부하며 살아갑니다.
그런데 오래전 헤어진 연인 아오이를 잊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쥰세이는 자신을 초대한 복원의 대가 조반나 선생의 추천으로 모두의 관심과 부러움 속에 치골리의 작품 복원을 맡게 됩니다.
그런데 쥰세이는 이전 애인인 아오이가 밀라노에 왔음을 알게 되고 그를 만나기 위해 떠납니다. 
 
그러나 그녀 곁엔 이미 새로운 연인이 있었고, 냉정하게 변해버린 그녀의 마음만을 확인한 채 쥰세이는 다시 피렌체로 돌아옵니다. 
그리고 자신이 작업 중이던 치골리의 작품이 처참하게 훼손된 채 발견됩니다.
그렇게 스튜디오가 문을 닫아 쥰세이는 일본으로 돌아옵니다. 
 
일본으로 돌아와 아버지가 자신의 아이를 밴 아오이에게 돈을 주며 자신을 떠나게 했음을 알게 됩니다.
그리고 아이도 아오이가 지운 줄 알았지만 실제로는 유산한 것이었습니다.
자신이 몰랐던 아오이에 대한 비밀과 오해를 풀게 된 쥰세이는 그녀의 행복을 비는 마지막 편지를 아오이에게 보냅니다. 
 
조반나 선생님의 갑작스러운 자살 소식에 쥰세이는 피렌체로 다시 오게 됩니다.
이때 동료로부터 미술품을 훼손한 건 쥰세이를 질투했던 조반나였다는 사실을 듣습니다.
 
아오이에 대한 마음을 접을 수 없던 쥰세이는 여자친구인 메미와 헤어지고 아오이 역사 마빈과 헤어집니다.
쥰세이는 오래전 두 사람의 약속을 떠올립니다. 
바로 그녀가 서른 살 생일이 되는 날에 연인들의 성지로 불리는 피렌체 두오모에서 만나기로 했던 것입니다.
아오이도 쥰세이가 그리워 남자친구를 혼자 미국으로 떠나게 하고 두오모 돔 위에서 둘은 만나 사랑을 확인합니다. 
 
두 사람은 잠깐 서로의 사랑을 확인하지만, 다음날 아오이는 다시 떠납니다.
쥰세이가 잡아줄 것을 기대했겠지만, 쥰세이는 미안해서인지 그녀를 잡지 않습니다.
그러나 쥰세이가 자신이 좋아서 자신을 보기 위해 왔다는 것을 알게 되고 밀라노로 떠난 아오이를 따라가서 만나며 영화는 끝이 납니다.
 
왜 우리는 냉정과 열정 사이에서 헤매며 뜨거워지지 못할까요? 실패할 것 같은 자존심 때문일 가능성이 가장 큽니다.
그래서 상대의 눈치를 봅니다. 
상대가 나를 좋아한다는 확신이 있어야 나도 움직입니다.
그런데 이런 관계는 둘이 관계가 좋아져도 또 그런 패턴이 반복될 가능성이 큽니다. 
 
둘의 문제는 상대에 대한 확신이 없어서가 아니라 ‘관계 자체에 대한 확신이 없어서’ 생긴 것입니다.
관계에 대한 확신이 있으면 상대가 확실히 싫다는 표현을 할 때까지 굳건히 나아갑니다.
그래서 주님이 맺어주셨다는 확신이 둘의 믿음보다 더 필요한 것입니다.
 
그냥 움직이려 하지 않는 두 사람 사이에서는 누구도 둘의 관계를 열정이 지속하고 유지해줄 수 없습니다.
왜 움직여야 하는지 그 이유를 모르기 때문입니다. 
 
강 위에 배를 타고 노를 젓는 사람과 젓지 않는 사람은 무엇이 다를까요?
아래든, 위든 노를 젓는 사람은 ‘소명’을 가진 사람입니다.
무엇이라도 해야 하는 소명이 있기에 무엇이라도 할 필요성이 있어서 그렇게 노를 젓는 것입니다.
 
그 심판의 시간이 ‘죽음’입니다. ‘죽음’을 대하는 자세가 나를 움직이거나 움직이지 않게 만듭니다.
죽음을 목전에 두면 누구나 노를 젓게 됩니다.
남기는 게 하나도 없고 후회만 남긴 죽음이 되는 것을 사람은 견디지 못합니다. 
 
​어느 젊은 사형수가 있었습니다. 
사형을 집행하던 날, 형장에 도착한 그 사형수에게 마지막으로 5분의 시간이 주어졌습니다.
절체절명의 시간이 초조히 지나고 있었습니다. 짧았지만 너무나도 소중한 시간이었습니다. 
‘마지막 5분, 이 마지막 5분을 어떻게 쓸까?’
 
그 사형수는 순간 상념에 젖었습니다. 가족들과 친구들을 생각하는 사이 벌써 2분이 지나 버렸습니다.
그리고 자신에 대하여 돌이켜 보려는 순간 ‘아~! 이제 3분이면 내 인생도 끝이구나’라는 생각이 들며, 세월을 금쪽같이 쓰지 못한 것이 정말 후회되었습니다.
‘아~! 다시 한번 인생을 살 수만 있다면….’
 
기적적으로 사형집행 중지 명령이 내려와 간신히 목숨을 건지게 되었습니다.
구사일생으로 풀려난 그는 그때부터 5분간의 시간을 생각하며 평생 ‘시간의 소중함’을 간직하고 살았습니다.
날마다 시간을 5분 단위로 계산하여 살았고, 마지막 삶의 5분처럼 언제나 최선을 다하여『죄와 벌』, 『카라마조프의 형제들』 등의 수많은 불후의 명작을 남겼습니다.
그의 이름은 도스토옙스키입니다. 
 
죽음은 커다란 힘이 있습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도 모르게 죽을 때에 삶의 심판을 받아야 함을 인식합니다.
그래서 오늘 죽는다고 생각하면 오늘은 충실히 살 수밖에 없습니다. 
심판은 분명 ‘소명’을 전제하기 때문입니다.
죽음은 존재 이유를 떠올리고 오늘 죽는다면 보지는 못했지만, 심판자 앞에 설 것이 두려워 일하게 되는 것입니다. 
 
저도 죽음을 생각하고 행복을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행복을 생각하고 노를 저었습니다.
방향이 틀렸더라도 노를 저으니 주님께서 회개시켜 주셨습니다.
 
우리는 움직이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그래야 주님께서 방향을 바로 틀어주십니다.
마치 죽지 않을 것처럼, 그래서 그냥 하루하루 살아가는 사람은 회개 자체가 불가능합니다.
바오로는 그렇게 소명으로 오늘 죽을 사람처럼 사는 사람이었습니다.
 
 
(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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