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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묵상

12월 31일 _ 전삼용 요셉 신부

작성자 : 관리자 작성일 : 2021-12-31 조회수 : 1374

요한은 마귀 들렸고 예수님은 먹보요 술꾼인가? 
 
오늘 복음은 소위 ‘로고스 찬가’라고 불립니다.
말씀이 사람이 되심, 곧 빛이 어둠에 내리심을 노래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노래에서 이상하리만큼 ‘세례자 요한’이 차지하는 비중이 큽니다.
세례자 요한의 제자였던 사도 요한은 빛을 증언하였던 세례자 요한의 역할을 그만큼 크게 보았던 것입니다.
빛이 세상에 왔지만, 세상은 빛을 알아보지 못하였습니다.
그래서 이미 빛을 보았던 세례자 요한만이 빛을 증언하는 유일한 예언자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모습과 세례자 요한의 모습은 사뭇 다른 것처럼 성경에 표현되어 있습니다. 
“사실 요한이 와서 먹지도 않고 마시지도 않자, ‘저자는 마귀가 들렸다.’ 하고 말한다. 
그런데 사람의 아들이 와서 먹고 마시자, ‘보라, 저자는 먹보요 술꾼이며 세리와 죄인들의 친구다.’ 하고 말한다.”(루카 11,18-19)
 
그래서인지 우리 가톨릭교회는 술 마시고 담배 피우고 큰 성당을 짓는 등의 모습이 그리스도의 삶과 크게 다르지 않다고 여기기도 합니다.
우리는 세례자 요한을 닮은 사람들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닮는 사람들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카나의 혼인 잔치에서 이미 술 취한 사람들에게 또 술을 만들어주신 것도 어느 정도 먹고 마시고 입는 것이 당연하다고 여기는 것입니다. 
 
하지만 세례자 요한의 모습과 예수님의 모습이 다를 수 있을까요?
정말 예수님은 먹고 마셨고, 세례자 요한은 단식만 했을까요?
예언자가 어떻게 증언하는 분과 닮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이태석 신부님이 예수님이라면 그분의 세례자 요한과 같은 분이 ‘울지마 톤즈’를 감독하였던 ‘구수환 피디’입니다.
그러나 예언자는 박해를 받게 되어있습니다. 
구수환 감독은 가톨릭 신자가 아닙니다. 
불교신자로 알고 있습니다.
유튜브 ‘체인지그라운드’에서 ‘부활’이라는 울지마 톤지 제2탄을 개봉하고 한 인터뷰에서 한 말은 의미심장합니다. 
 
“사실 밖에서는 잘 모르시지만, 가톨릭 단체로부터 ‘왜 저널리스트인 당신이 신부님의 삶을 일반화시켜서 (돈벌이로) 이용을 하느냐?’라고 굉장한 공격을 당했습니다. 
그래서 제가 소송까지 당했습니다.
신부님에 대해 제가 좋은 이야기하고 다니는데, 신부님을 이용해 돈벌이한다는 기사들이 주요 일간지에 실리게 되었습니다.
제가 신부님처럼 살지 않으면 사람들이 안 믿는 거예요.
제가 신부님처럼 살아야 신부님 이야기를 했을 때 ‘아, 저 사람은 믿을 수 있는 사람이구나!’라는 생각을 하니까
동시에 책임감을 느낍니다.
이태석 신부님에게 누가 되는 행동을 하면 안 된다. 그러니까 거의 개인 생활은 없습니다.
 
사람들은 누군가를 증언하는 사람이 그 증언하는 대상과 닮았는지를 먼저 봅니다. 
그래서 닮지 않았다면 믿지 않습니다.
세례자 요한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리스도를 전하는 이의 삶이 그리스도와 닮아있지 않으면 세상 사람들은 그를 통해 돈벌이한다고 여길 것입니다. 
구수환 피디는 또 말합니다. 
 
“이 영화 찍는데 3억 들어갔고 수입이 5천만 원이었습니다. 손해 보는 게 왜 즐겁고 행복한가?
사실 코로나 때문에 많은 분이 영화를 볼 수는 없었습니다. 
그런데 저는 반대로 생각했습니다.
만약 이게 흥행이 되었다면 제가 더 부담스러웠을 것입니다.
 
‘신부님 팔아서 돈 많이 벌었어!’ 이런 이야기가 제일 두려웠습니다. 이런 잡음이 안 나와 좋았습니다.
이태석 신부님은 쉽게 나의 이야기를 전하지 마라, 뛰어다니며 직접 전해라!’라고 하시는 것 같았습니다.
돈과 상관없이 이태석 신부님의 삶을 전하고 사람들의 생각을 변하게 만드는데 이런 기회는 없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구수환 피디는 영화를 찍고 하도 가톨릭에서 항의가 많이 들어와서 회사에서 다른 곳으로 쫓겨나는 수모를 겪었다고 합니다.
그런데도 신부님을 놓지 않는 이유는 세상 사람들의 마인드를 바꿀 ‘기회’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추적 60분’과 같은 고발 프로그램으로는 사회를 변화시킬 수 없음을 깨닫고 신부님의 섬기는 삶을 보여줌으로써 사회를 변화시키고 싶었던 것입니다. 
 
또 이태석 신부님을 증언하는 이들은 그분이 가르친 아이들이었습니다.
구수환 피디는 다시 톤즈로 가서 2010년 만났던 아이들을 다시 찾기 시작하였습니다.
10년 만에 만난 아이들은 의대생이 되어있었습니다.
2010년 당시 한 60여 명 들어갈 수 있는 교실에 130명 정도가 들어가 열띠게 수업하는 모습을 찍은 적이 있는데 그때 구 피디가 물었습니다. 
 
“너희들 하루하루 먹기 힘든데, 왜 의대에 가려고 하니?”
“의대에 가려고 합니다.”
대부분이 이렇게 말하는 것을 듣고는 구 피디가 또 물었습니다. 
 
“돈도 없는데 왜 의대에 가려고 하니? 의사는 왜 되려고 하는데?”
그들의 대답은 이랬습니다. 
“이태석 신부님처럼 살고 싶습니다.”
 
그리고 그 아이들이 의대에 간 것을 보고 너무 놀랐다고 합니다. 왜냐하면, 그 나라가 아무리 가난해도
‘그래도’ 의대는 공부를 굉장히 잘하는 학생들이 간다고 합니다. 의아했습니다. 
 
‘우리로 말하면 산골에 있는 조그마한 학교에서 그 4~5년 만에 어떻게 59명의 아이가 의대에 갈 수 있었을까?’
이것이 굉장한 기적이라 생각했고 그래서 의대 다니는 아이들을 만나고 새로운 다큐멘터리를 만들어야겠다고
결정하게 된 것입니다.
 
그러다 보니 기자, 공무원, 대통령 경호실 등에 근무하는 다른 많은 아이도 있음을 알게 됩니다. 
물론 그때까지만 해도 ‘아이들이 잘 성장했구나!’라는 정도만 생각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한센인 마을에 가서 진료하는 모습을 보고 깜짝 놀랐습니다.
놀란 이유는 진료할 때 먼저 어디가 아프냐고 물어봐야 하는데 그들은 먼저 ‘악수’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물어봤습니다. 
 
“너 왜 자꾸만 악수하니?” 
“이게 신부님 진료 방식이에요.”
신부님이 쓰신 글에 이렇게 나온다고 합니다. 
“의사와 환자의 만남은 아픈 사람과 치료해주는 사람의 만남이 아니라 영혼과 영혼의 만남이다.”
 
진료가 끝나고 나서 한센인 환자들에게 물어보았습니다. 
“10년 만에 의사가 손을 잡아주었는데, 느낌이 어떻습니까?”
“신부님이 돌아오신 것 같습니다.”
 
그 당시에 몸에 전율이 오는 것 같았고, 다큐멘터리의 제목을 ‘우리가 의사 이태석입니다’라고 하려고 했는데,
‘아, 이것이 진정한 부활이구나!’라고 생각이 되어 제목을 ‘부활’로 바꾼 것입니다. 
 
빛이 있고 빛을 증언하는 이가 있습니다. 
그런데 빛을 증언하는 이가 빛과 다를 수 있을까요?
사람들은 세례자 요한이 메시아일 것으로 추측하였습니다. 
그 이유는 빛과 너무 닮아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세례자 요한의 모습과 예수님의 모습이 다르다고 여겨서는 안 됩니다.
 
예수님은 세속-육신-마귀를 광야에서 이기시고 가난과 정결과 순명의 겸손으로 사셨습니다.
그분은 머리 뉠 곳조차 없으셨고 성당을 짓기보다는 돌아다니시며 공간만 있으면 아무 곳에서는 설교하셨습니다.
 
첫 미사를 하시기 위해 성당을 짓지도 않으셨습니다. 남의 집을 빌려 미사를 제정하셨습니다.
아무것도 가진 게 없으셨기 때문입니다.
만약 교회가 부자가 되고 권위적으로 된다면 더는 그리스도를 증언하는 능력을 상실했다고 봐야 합니다. 
 
‘어둠’이란 사람이 되신 ‘사랑’과 반대입니다.
하느님 사랑의 법과 반대되는 어둠은 곧 재물에 대한 욕심, 무절제한 생활, 교만한 마음입니다.
그러니 가난하고 절제하고 겸손한 세례자 요한의 모습이 빛을 본 사람의 상징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만약 지금 나의 모습이 세례자 요한의 모습과 비슷하지 않고 혹은 그 모습으로 더욱 다가가지 않는다면 분명 나는 빛이신 그리스도께로 나아가는 것이 아닙니다.
그리스도보다 먼저 우리가 닮아야 할 대상은 그분을 증언하는 세례자 요한입니다.
 
증언하는 자는 증언하는 대상과 닮을 수밖에 없습니다.
증언자와 닮는다면 그다음은 증언하는 대상과 닮으려 해야합니다.
 
교회에서 세례자 요한의 모습이 잊혀서는 절대 안 됩니다.
그러면 예수님도 알 수 없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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