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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묵상

12월 30일 _ 전삼용 요셉 신부

작성자 : 관리자 작성일 : 2021-12-30 조회수 : 1413

잡생각 끊는 방법: 내 생각은 내가 사는 집에 의해 결정된다
 
오늘 복음에서 예언자 한나는 시메온과 함께 아기 예수님이 누구인지 알아봅니다.
한나는 남편과 일곱 해를 살고서는 여든네 살이 되도록 평생 성전에서 기도와 단식하며 밤낮으로 하느님을 섬긴 여인입니다. 
 
왜 성경은 굳이 그녀가 남편과 일곱 해를 살았던 것과 그 이후 성전에서 산 것을 밝힐까요?
그 이유는 그녀의 거처가 남편의 거처에서 하느님의 거처로 옮겨진 사실이 적지 않은 의미를 지님을 말하려는 것입니다. 
 
남편의 거처에 살면 그녀는 남편의 아내가 됩니다. 그러면 아내로 생각하고 아내의 감정으로 살았을 것입니다.
그러면 주님을 볼 여유가 없습니다. 한나는 세상에서 얻을 수 있는 자기 정체성을 주거지를 바꿈으로써 변화시킨 것입니다.
성전에 사는 예언자라는 정체성은 세속에서 굳이 신경 써야 하는 일에서 벗어나게 합니다.
내 생각은 나의 정체성에 의해 규정되기 때문입니다. 
 
만약 내가 학생이라면 학생이 아닌 사람이 가질 필요가 없는 생각과 감정으로 살아야 할 수밖에 없습니다.
자신이 어쨌거나 학교라는 공간에 머물러야 하기 때문입니다. 
사제라고 별반 다를 바가 없습니다.
사제는 성전에서 살아야 하지만 실제로는 다른 집에 살 수도 있습니다. 
 
2021년 12월 30일 「매일미사」 묵상글에 청주교구 서철 바오로 신부의 이런 글이 있습니다. 
이탈리아로 유학 간 첫 학기에 유독 어려운 과목이 있었습니다.
‘기업 윤리’라는 과목이 있었는데, 언어도 문제였지만 토론 수업이라 도무지 수업을 따라갈 수가 없었습니다.
수업 시간마다 교수님께서 질문하셨습니다. 
번번이 한마디 말도 못 하고, 그저 멋쩍은 웃음으로 답을 대신하였습니다.
그렇게 한 학기가 끝날 때쯤 교수님도 답답하셨는지 이렇게 놀리셨습니다. 
 
“자네는 성탄 방학이 되면 시칠리아섬의 작은 본당으로 봉사하러 갈 것이네.
가서 고해성사도 주고, 성탄 밤 미사 강론을 할 텐데, 신자들 앞에서 떠듬거리며 ‘오늘 밤은 성탄입니다’ 하고 한마디만 하면 신자들이 손뼉을 치고 난리가 날 것일세.”
 
신부님은 생각했습니다. 
‘아니 내 나이가 몇인데, 신부인 나를 다른 학생들 앞에서 놀리다니.’
신부님은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하며 화가 나서 견딜 수가 없었습니다. 
 
마침 그날은 영성 지도를 받는 날이었는데, 지도 신부님을 만나자마자 수업 시간에 있었던 일을 
큰 소리로 이야기하기 시작했습니다. 
한참 이야기를 듣고 있던 신부님은 이런 질문을 했습니다. 
 
“바오로, 이 일로 배운 게 있어?”
“네. 저는 가르치는 사람이 되면 절대로 학생을 놀리지 않겠습니다.”
“그래. 또 배울 게 있어?”
 
신부님은 생각을 좀 하다가
“제가 이탈리아 말을 잘 못 해서 이런 일이 생겼으니 언어 공부를 좀 더 열심히 해야겠습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래. 또?”
“네. 이젠 없습니다.”
“그럼, 잊어버려!” 
 
신부님은 그 말을 듣는 순간 또 흥분하여 “아니 어떻게 잊습니까? 제가 이런 취급을 당하는 게 말이 됩니까?”
하며 씩씩거렸습니다. 
영성 지도 신부님은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바오로, 너 지금 기도할 수 있어?”
“아니, 지금 기도가 중요합니까? 그 교수가 저를 놀렸다니까요?”
 
그러자 영성 지도 신부님은 “바오로, 하느님이 중요해, 아니면 그 교수가 중요해?
지금 네 마음을 온통 그 교수의 말에 빼앗겼잖아! 하느님이 중요하다고 말은 하지만 정작 너의 마음을 그 말에 빼앗겨 하느님은 안 계시잖아. 바오로, 단 1초라도 네 마음을 다른 사람에게, 하느님 아닌 다른 것에, 세상 것에 빼앗기지 마!” 라고 말했고, 이 말을 듣는 순간 신부님은 홍두깨로 얻어맞은 듯한 느낌이 들었습니다.
 
그러며 날마다 기도와 단식에 전념하던 한나 예언자처럼 단 1초라도 하느님 아닌 세상 것에
우리 마음을 빼앗기지 않아야겠다고 말합니다. 
 
사람을 ‘행동’하게 만드는 것은 ‘감정’입니다. 바오로 신부님은 교수가 한 말이 감정이 상했습니다.
그 감정은 그 사건을 자꾸 ‘생각’하므로 일어납니다. 영성 지도 신부님은 생각을 주님께 돌리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생각은 ‘정체성’에 의해 규정됩니다. 내가 판사라면 판사의 일을 생각하고 도둑이라면 도둑의 일을 생각할 것입니다.
따라서 생각을 무조건 하느님께로 올리려 한다고 쉽게 되지 않습니다. 
정체성부터 확고하게 바꿔야 합니다.
이는 마치 잘못 걸려온 전화가 계속 온다면 자신은 누구누구라고 명확하게 말해주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면 다시 전화가 오지 않습니다. 
사제라는 정체성은 학생이라는 정체성에서 벗어나게 해 줄 것입니다.
그런데 사제는 어디 머무는 사람입니까? 성전에 머무는 사람입니다.
정체성이 생각을 규정하기는 하지만, 그 정체성은 또 자신이 머무는 집에 의해 규정됨을 알아야 합니다. 
 
한나 예언자가 성전에 머물지 않으면서 예언자로서의 정체성을 유지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했을 것입니다.
성전에서 기도와 단식으로 주님을 섬기는 일을 밤낮으로 했기 때문에 그 정체성이 유지될 수 있었습니다.
 
아무리 사제라고 하더라도 여행자로 몇 년 동안 놀러만 다니며 신자들과 미사도 하지 않는다면 사제는 자신이 사제인지 여행자인지 구분할 수 없어지고, 그러면 사제로 생각해야 할 것보다 여행자로 해야 하는 생각이 그 사람을 가득 메우게 됩니다.
따라서 개집에 머물면 개가 되고 그러면 개의 생각과 감정으로 행동하게 되지만, 우리가 성전에 머물면 하느님 자녀가 되고 그 정체성에 맞는 생각과 감정으로 행동하게 됨을 알 수 있습니다. 
 
누구나 내가 초대한 대상의 집에 삽니다.
생각은 나의 정체성에 의해 이루어지는데, 나의 정체성은 내 안의 동굴에서 내가 누구와 대화하느냐에 달려있습니다.
그 누가 바로 내 집을 규정하고 그 규정된 집의 정체성이 곧 나의 정체성을 만들기 때문입니다.
 
내 집은 내가 평소에 대화하는 대상의 집입니다.
내가 주님의 집에 산다면 자아가 나에게 말을 걸어올 때 잘못 걸려온 전화라고 하며 바로 끊을 수 있게 됩니다.
잘못된 전화가 오면 어떻게 하면 됩니까? 내 집의 정체, 혹은 나의 정체성을 밝히면 됩니다.
그러면 그쪽에서 더는 대화를 할 수 없게 됩니다. 
 
나는 누구와 함께 삽니까? 그 안에 신이 있으면 나는 성전에 사는 것이고 그 안에 뱀이 있다면 나는 다른 존재가 됩니다.
이는 평소에 누구와 대화하며 사느냐에 의해 결정됩니다. 
우리는 그 정체성에 따라 생각하고 느끼고 행동하다가 죽습니다.
 
하지만 내가 하느님 자녀가 되지 않으면 구원을 위한 사랑의 계명을 지킬 수 없습니다.
자녀만이 부모의 뜻을 이어받기 때문입니다.
한나 예언자처럼 성전에 머뭅시다.
그래야 세상 것들과 대화를 할 사람이 아님을 내가 알고 쓸데없는 생각들은 바로바로 끊어지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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