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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묵상

12월 22일 _ 전삼용 요셉 신부

작성자 : 관리자 작성일 : 2021-12-22 조회수 : 1219

자기 성취가 커질수록 기쁨이 줄어드는 이유
 
오늘 복음에서 성모님은 엘리사벳을 방문하시고 주님께서 당신을 도구로 쓰시어 엘리사벳과 태중의 아들이 성령으로 기뻐 뛰게 하심을 보며 당신도 기쁨에 넘쳐 “내 영혼이 주님을 찬미하며 나를 구하신 하느님께 내 마음 기뻐 뛰노나니….”라고 찬미를 올립니다. 
 
성모님은 참 기쁨이 자기 뜻을 성취하는 데 있지 않음을 명확히 보여주셨습니다.
기쁨의 원천은 나를 만드신 분이 나에게 바라시는 뜻이 나를 통해 이루어지도록 내가 그분 뜻에 나 자신을 맡겼을 때 일어나는 것입니다.
 
삶의 의미가 나에게 실현되었을 때 일어나는 것이 기쁨입니다.
나의 힘으로 성취한 일은 오히려 행복을 갉아먹습니다.
성공과 함께 자아도 커져서 나의 기쁨을 다른 사람의 인정에서 얻으려 하기 때문입니다. 
 
“누가 기침 소리를 내었는가?”로 현대에도 유명해진 궁예는 천민으로 태어나 가장 밑바닥에서 시작하여
후고구려를 건국한 인물이었습니다. 
하지만 그가 이루어낸 엄청난 성취는 그에게 기쁨이 되지 못했습니다. 
 
그는 한 나라의 초대 왕이 되었음에도 그것으로 만족하지 못하고 자기가 미륵불이라 자처하며 부처와 같은 수준에 있다고 믿었습니다. 
그래도 만족할 수 없었습니다.
다만 한 사람이라도 자신의 성취를 존중해주지 않는다면 바로 그 사람을 죽일 준비가 되어있었습니다.
그가 관심법이라는 명상을 하고 있을 때 기침 소리가 들렸습니다. 
 
“누구인가? 누가 기침 소리를 내었어. 누가 기침 소리를 내었는가 말이야!”
한 신하가 말합니다.  “소인이옵니다. 폐하.”
“참으로 딱하구나. 짐이 지금 관심법을 하고 있는데 어찌 기침을 할 수 있었느냐, 이 미련한 것아.”
“송구하옵니다, 폐하. 용서하여 주시옵소서.”
“내가 가만히 보니 네 머리에는 마군이(불도를 방해하는 온갖 번뇌를 비유하여 이르는 말)가 가득 찼구나.
여봐라. 저자 안에 있는 마군이를 때려죽여라!”
 
이렇게 신하뿐만 아니라 여인들까지도 철퇴로 죽이는 일이 빈번하였습니다. 
마군이를 죽이기 위해서였을까요?
자아가 너무 커져서 자기를 무시한다고 여겼기 때문입니다.
자기 뜻대로 무언가 성취한 사람은 그 성취와 함께 자아도 커지기 때문에 기쁨을 외부 사람들의 인정과 존중에서 얻으려 합니다. 
그리고 존중해주지 않으면 화를 냅니다. 
 
세상에서의 성취는 나의 자아와 함께 성장하기 때문에 마치 ‘아귀’가 되는 것과 같습니다.
덩치는 커지는데 목구멍은 작아져서 몸이 커질수록 점점 배가 고파지는 지옥이 되는 것입니다. 
 
제가 아마 세상에서 가장 기뻤던 때는 시험을 너무 못 보았는데 대학에 합격했다는 소식을 받은 순간입니다.
그러나 그 기쁨이 얼마나 갔을까요? 하루도 못 간 것 같습니다.
바로 등록금을 걱정을 해야 했고 대학에 들어가니 또 군대와 취직 걱정이 시작되어야 했습니다.
 
우리 힘으로 이룬 기쁨은 이렇게 오래 걸리고 짧게 끝납니다.
그리고 옆에 나보다 더 좋은 대학에 간 사람이 있다면 그 기쁨은 바로 끝나고 맙니다. 
 
반면 책 『단순한 기쁨』은 빈민구호 단체인 ‘엠마우스’를 만들어 집 없는 가난한 사람들과 소외된 사람들과 함께 평생을 보낸 아베 피에르 신부님의 일생이 왜 기쁨을 수밖에 없었는지 적은 책입니다.
 
피에르 신부는 부유한 상류층에서 태어나 19세 때 많은 재산을 상속받았지만, 그것을 포기하고 수도원에 들어가 2차 세계대전 당시 유대인들을 스위스로 피신시키는 일에 앞장섰고 전쟁 후에는 국회의원으로 엠마우스를 만들어 평생 고통받는 가난한 약자들을 위해 사신 분입니다.
지금의 엠마우스는 전 세계 44개국, 350여 개의 단체가 되어 수많은 가난한 이들을 돕고 있습니다. 
 
이분이 엠마우스를 시작할 때 첫 조력자요 협조자였던 사람은 자살 직전의 위태로운 인물이었습니다.
사람들이 신부님을 불러 가보니 그 사람은 자살 외에는 더는 살 의미를 잃은 사람이었습니다.
신부님은 그 사람의 일생을 들어주었습니다. 
 
그 사람은 가정부였던 어머니가 있었습니다. 가정부였지만 주인이 죽으면서 물려줄 재산을 받을 친척이 없자 주인은 가정부인 그 사람의 어머니에게 재산을 상속했던 것입니다.
 
그러자 그 재산을 노린 많은 남자가 어머니에게 접근했습니다. 그중 한 명이 그 사람의 아버지가 된 것입니다.
어머니는 아버지와 혼인했음에도 재산을 아버지에게 넘기지 않았습니다.
 
그 와중에 아들이 결혼하려고 하자 모든 재산을 잃을까 봐 아버지는 아들의 결혼을 깨기 위해 편지를 대필하여 아들의 애인에게 보내 둘이 헤어지게 했습니다.
그리고 아버지가 재산을 빼돌리기 위해 마련한 한 여인과 아들이 결혼하게 합니다. 
 
나중에야 이 사실을 안 아들은 총을 들고 아버지와 편지를 대필한 사람을 찾아갔습니다.
아버지를 죽일 생각은 없었지만 어찌하다 아버지는 총에 맞아 죽고 편지를 대필한 사람은 중상을 입었습니다.
그는 종신형에 처해졌습니다.
그가 감옥에 있는 동안 불이 났었는데 그는 목숨을 걸고 다른 죄수들을 도왔고 그 덕분으로 그는 사면을 받게 됩니다.
 
집에 돌아와 보니 역시 아내는 모든 재산을 가지고 다른 남자와 살고 있었고 딸도 아버지에게 등을 돌린 지 오래였습니다.
아무것도 없이 쫓겨난 처지가 된 그는 당시 죽음에 이르는 병이었던 결핵에 걸리게 됩니다. 
 
이 이야기를 듣자 피에르 신부는 고개를 끄덕이며 자살할 충분한 이유가 된다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그 전에 자신을 좀 도와달라고 했습니다.
지금 엠마우스라는 것을 하려 하는데 도와줄 사람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그도 죽기 전에 신부님 일을 조금이나마 도와주겠다고 했고, 그렇게 15년 동안 엠마우스의 최고 조력자가 되었습니다.
그는 15년 동안 신부님을 도와주고 결핵으로 죽습니다. 그때 자신의 삶을 되돌아보며 이렇게 회상합니다. 
 
“신부님께서 그때 제게 돈이든 집이든 그저 베푸시기만 했다면 아마도 저는 다시 자살을 시도했을 겁니다.
제게 필요한 것은 살아갈 방편이 아니라 살아야 할 이유였기 때문입니다.”
 
살아갈 이유를 자기 자신이 정할 수 있을까요? 내가 가진 스마트폰을 한 번 보십시오.
그 스마트폰에 이성이 있어서 살아갈 의미를 알아서 정하라고 하면 그 스마트폰은 올바른 살아갈 의미를
정할 수 있을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모든 살아갈 의미는 자신을 만든 이에게서 옵니다. 그리고 살아갈 의미를 살아갈 때 느끼게 되는 감정이 ‘기쁨’입니다.
스마트폰은 스마트폰으로 사용될 때 가장 기쁠 수밖에 없습니다. 
인간은 하느님의 뜻으로 살아갈 때 가장 기쁩니다.
 
따라서 나의 힘으로 이룬 성취로 나의 기쁨을 찾겠다는 말만큼 어리석은 말이 없습니다.
만족하지 못하는 자아를 공룡처럼 커지게 하겠다는 말인데, 이 세상에는 공룡을 기쁘게 할 만한 음식을 줄 사람이 아무도 없습니다. 
 
삶의 기쁨을 내 뜻이 아니라 나를 창조하신 분의 뜻에서 찾아야 합니다.
그래야 자아가 작아져서 자신 안에서 주님께서 일을 성취하시는 것을 보고 기뻐합니다.
 
오늘 성모님께서 하느님을 찬미한 이유가 이것입니다. 성모님은 하느님께 순종하셨습니다.
그랬더니 기대하지 못했던 성취가 일어납니다. 
이것은 내가 한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해주신 일입니다.
내가 한 일이 아니기에 불만족의 블랙홀인 자아가 설칠 여지가 없습니다.
 
다만 내가 주님께 나를 내어드렸기 때문에 주님께서 놀라우신 일을 하는 것을 보고는 주님을 찬미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다른 사람이 나를 뭐라고 하건 나는 나를 통해 주님의 업적을 봅니다.
그래서 이 기쁨은 세상이 빼앗을 수 없는 기쁨이 됩니다. 
 
하느님께서 나를 만드신 이유가 나에게서 드러나도록 합시다.
그러면 그 뜻을 따르기 위해 나를 내어주는 짧은 고통은 있지만, 아주 오랜 기쁨이 뒤따릅니다.
이 기쁨은 세상이 빼앗아갈 수도 없고 줄어들지도 않습니다.
그리고 내 힘으로 하는 것보다 더 큰 일을 하게 됩니다.
 
내 힘으로 이룬 성취는 오히려 나를 교만하게 만들어
조금이나마 있었던 기쁨과 행복을 갉아먹는 독이 됨을 잊지 맙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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