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거의 모든 기억을 감사의 역사로 바꿔야 하는 이유; 현재의 감사를 알아보기 위해
오늘 복음은 마태오 복음사가의 예수님의 족보입니다. 족보는 이렇게 결론맺습니다.
“야곱은 마리아의 남편 요셉을 낳았는데, 마리아에게서 그리스도라고 불리는 예수님께서 태어나셨다.
그리하여 이 모든 세대의 수는 아브라함부터 다윗까지가 십사 대이고, 다윗부터 바빌론 유배까지가 십사 대이며, 바빌론 유배부터 그리스도까지가 십사 대이다.”(마태 1,16-17)
루카 복음에도 예수님의 족보가 나오는데 마태오 복음처럼 정확히 십사 대씩 자르지는 않습니다.
족보를 십사 대씩 정확하게 나눈다는 것은 그리스도의 족보 안에 ‘하느님의 섭리와 계획’이 들어있음을
표현하기 위함입니다.
하느님께서 계속 인류구원을 위해 역사 속에서 섭리하셨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과정은 분명 죄와 벌로 점철된 것처럼 보이나 결과는 ‘그리스도’라는 축복으로 끝납니다.
이 사실을 아는 사람만이 그리스도를 받아들일 수 있는데, 그 이유는 과거가 온통 나를 향한 하느님 사랑이라는 믿음이 없다면 현재를 살 수 없기 때문입니다.
‘어웨이 프롬 허’(2006)는 ‘기억이 사라지만 사랑도 사라질까?’라는 질문은 던지는 영화입니다.
그랜트와 피오나는 결혼한 지 44년이 된 행복한 노부부입니다.
그러나 피오나가 치매에 걸려 프라이팬을 냉장고에 넣고 글 읽는 법도 잊어버리게 됩니다.
기억이 점점 사라져가는 자기 자신 때문에 남편의 짐이 될 것으로 생각한 피오나는 스스로 요양원에 머물기를 고집합니다.
그랜트는 차마 아내를 떠나보낼 수 없어 주저하지만, 급기야 그녀가 집에 돌아오는 길을 잃어버리게 되자
결국 요양원에 가는 것에 동의합니다.
요양원 적응 법규상 한 달은 누구의 면회나 전화 통화도 안 되는 상황이었습니다.
한 달 뒤 피오나를 만난다는 설렘에 요양원을 방문하지만, 피오나는 왠지 그랜트를 대하는 것이 시큰둥합니다.
그 이유는 그동안 남편을 잊은 채 오브리라는 사랑하는 남자가 생겼기 때문입니다.
그랜트는 매일 방문하여 피오나에게 자신이 남편임을 기억하게 하려 하지만 피오나는 자신의 얼굴을 그려주는 오브리에게 더 큰 사랑의 감정을 느낍니다.
“내가 당신의 남편인 것을 잊지 말아요”라고 말하며 오브리의 어떤 면이 좋냐는 그랜트의 질문에 피오나는 말합니다.
“그 사람은 나를 혼란스럽게 하지 않아요. 전혀.”
그랜트와 마찬가지로 오브리의 아내도 이런 사실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오브리를 자신의 집으로 데려갑니다.
오브리와 피오나는 부둥켜안고 슬퍼합니다.
피오나는 그랜트와 함께 있는 것이 어색하기만 합니다.
그래서 집으로 데려달라고 합니다.
집은 요양원입니다.
그리고 그녀는 급격히 쇠약해져 갑니다.
그랜트는 아내의 슬픔을 덜어주려 다시 오브리를 데려오려 고군분투합니다.
그런데 마침내 그랜트가 오브리를 그녀 앞으로 데려오는 순간, 피오나의 기억 하나가 깜빡이며 남편을 알아보게 합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합니다.
“날 버릴 수도 있었는데, 지켜주어서 고마워요….”
사실 이 장면은 명확하지가 않습니다.
피오나에게 정말 기억이 돌아온 것인지, 그동안 그냥 오브리가 좋아서 그랜트와의 기억을 잊은 것처럼 연기한 것인지.
그리고 지금도 어차피 마지막까지 자신을 지켜주어야 할 사람이 오브리가 아니라 그랜트이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그렇게 말하는 표정 같기도 합니다.
어쨌든 사람은 과거의 사랑했던 기억을 하지 못하면 나이가 들어도 다시 육정으로 살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과거의 사랑했던 기억을 잊어버리지 않기 위해 노력해야 합니다.
무엇보다도 부모님의 사랑과 하느님의 사랑을 기억해야 합니다.
좋은 기억이 없어도 김희아 씨처럼 모든 기억을 감사한 하느님 섭리로 만들어야 합니다.
이 믿음의 작업도 묵상기도에서 하는 것입니다.
만약 모든 기억을 감사로 바꾸지 않으면 현재를 살 수 없습니다. 과거에 갇히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현재에 머무시는데 항상 과거에만 머물면 주님을 만날 기회를 영영 얻지 못하게 될 수도 있습니다.
인도 영화 ‘가지니’(2008)는 한 남자가 자신이 보는 앞에서 애인이 살해되는 장면을 목격하고 자신도 머리에 크게 다친 산제이의 삶을 다룬 작품입니다.
산제이는 머리를 심하게 다쳐 15분 전의 모든 기억이 사라집니다.
다만 복수해야 한다는 사실을 온몸에 새겨넣어 잊지 않으려 하고 친구와 적을 구별하기 위해 사진을 찍어 이름과 어떤 사람인지를 적어놓습니다.
현재를 포기하고 자꾸 과거에만 머물려 하는 산제이의 모습은 마치 지옥을 사는 사람과 같습니다.
과거에서 벗어나는 방법은 그 모든 것을 ‘하느님 섭리’로 여기는 것입니다.
과거에 있었던 그 큰 상처들을 어떻게 감사로 바꿀 수 있느냐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 안에서는 불가능한 일이 없습니다.
과거가 모두 감사가 되지 않으면 자신 앞에 예수님께서 나타나셔도 보지 못합니다.
그분은 항상 지금-여기에 계시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이번 성탄 때 예수님을 만나고 싶다면 나를 과거에 묶어놓은 기억들이 있다면 그것들을 감사로 바꾸는 작업부터 하시면 좋을 것 같습니다.
저도 과거에 분명 세상눈으로 안 좋은 일들을 겪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그 기억들은 제가 지금 사제생활을 하는데 큰 재산이 됩니다.
제가 사제서품을 받기 위해 마지막 피정을 할 때였습니다.
저는 피정 내내 “주님께서 저를 사제로 불러주셨으면 표징을 주십시오”라고 기도하였습니다.
일주일 넘게 그런 표징을 바랐지만, 주님은 주시지 않으셨습니다.
다만 과거로부터 저를 부르고 계셨음을 묵상하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마지막 날도 종일 혼자 산에서 묵상하다가 저녁 식사에 맞춰 내려오고 있었습니다.
그때 앙상하게 죽은 작은 나무에 나뭇잎이 하나만 간신히 달린 모습이 보였습니다.
왜인지 오 헨리의 『마지막 잎새』 생각도 나며 그 밑을 지나칠 즈음에 그 마지막 잎새가 제 바로 앞으로 툭 하며
휘날리듯 떨어지는 것이었습니다.
그때 그 나뭇잎 주위로 시간과 공간이 흡수되는 듯 하며
소름 같은 것이 돋았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씀하시는 듯하였습니다.
“너는 행복이란 것으로 할머니의 죽음 때부터 너를 부른 줄 알겠지만 그렇지 않다.
나는 네가 사제가 되기 직전에 그런 청을 할 것도 알고 있었다.
그래서 네 앞에서 마지막 잎새가 떨어지게 함으로써 난 네가 태어나기 전부터 이 세상이 창조되기 전부터
너를 부르고 있었다는 것을 깨닫게 하고 싶었다.
바로 네가 지나갈 이 자리에, 그리고 이 시간에 마지막 잎새가 떨어지도록 이 나무가 심어지고 그 잎에 떨어지도록 한 것이다.”
말로는 설명해도 그 느낌을 다 전달할 수는 없는 것 같습니다.
어쨌건 저는 주님의 응답을 받았다고 믿었고 서품을 받아 사제가 되었습니다.
주님은 말씀하지 않으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들을 준비가 되어있지 않은 것입니다.
그냥 스쳐 지나갈 그런 사건 속에서도 내가 침묵하며 주님의 음성에 귀 기울이고 있다면 주님은 반드시 만나주시고 말씀해주십니다.
그러면 방향을 헛갈리는 일이 없습니다.
그러기 위해 과거의 기억들을 감사로 정리하는 작업을 하고 현재에 서야 합니다.
주님은 우리가 존재하게 된 이후 단 한 순간도 우리를 사랑하지 않으신 적이 없습니다.
모든 기억을 감사와 찬미로 바꾸고 지금 여기에 계신 주님을 만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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