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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묵상

12월 16일 _ 전삼용 요셉 신부

작성자 : 관리자 작성일 : 2021-12-16 조회수 : 1385

항구보다 먼저 등대를 찾아야 하는 이유: 예수님보다 세례자 요한
 
오늘 복음은 세례자 요한에 관한 마지막 부분입니다. 
세례자 요한은 광야에서 사람들을 그리스도께로 인도하는 역할을 하였습니다.
하느님은 세례자 요한을 그리스도에 앞서 보내시어 사람들이 그분께로 오는 길을 닦게 하셨습니다. 
 
세례자 요한은 광야에서 어떤 역할을 했을까요? ‘침묵’시키는 일입니다.
그리스도께서 ‘말씀’으로 세상에 오셨다면 그분을 만나면 우리는 ‘침묵’이 됩니다. 
그런데 세례자 요한이 우리를 침묵시키는 방식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과 다릅니다.
우리는 노력하면 침묵할 수 있다고 여기겠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한 부인이 병원에서 아이를 낳고 집에 돌아왔는데 돌연 막연한 공포감이 엄습했습니다.
남편이 출근하고 나면 괜히 불안했습니다. 
누가 문을 열고 들어오거나 창문을 열고 들어올 것만 같았습니다.
‘도대체 내가 왜 이러는 거지?’
 
퇴근한 남편에게 이런 말을 했더니 시큰둥한 반응이었습니다.
“아파트에서 무서울 게 뭐가 있어? 창문에 쇠창살까지 붙어 있겠다, 아파트 입구에는 경비 아저씨까지 있어.
푹 쉬면 나을 거야.”
 
그러나 불안증은 갈수록 심해졌습니다. 
TV나 신문기사에서 안 좋은 것을 읽고는 그것이 자신에게 일어날 것만 같아 떨렸습니다.
상상에 상상을 더하고 불안에 불안을 더했습니다. 이래서는 안 되겠다 싶어 콜택시를 불러 아기와 함께
30분 거리의 친정으로 달려갔습니다. 
집에 있던 어머니가 깜짝 놀라 말했습니다.
“너 왜 갓난아기를 안고 돌아다녀?”
 
그녀는 모든 게 무섭다는 이야기를 털어놓았습니다.
“그럴 수도 있지. 그래도 이렇게 나돌아다니면 못 써. 어서 돌아가!”
철석같이 믿었던 어머니마저 자신의 속마음을 헤아려주지 않자 더 절망에 빠졌습니다.
 
‘나를 이해해주고 보호해줄 사람은 이 세상에 아무도 없어.’
그녀는 집으로 돌아가던 중 강가에 내려 아기를 안고 강물로 뛰어들었습니다.
다행히 지나가던 한 시민의 도움으로 그녀는 가까스로 목숨을 건졌지만, 아기는 숨지고 말았습니다.
 
  [출처: 『마음을 비우면 얻어지는 것들』, 김상운, 21세기 북스]
 
이는 김상운 씨가 방송일을 할 때 실제 접했던 사건이었습니다.
문제는 우리 자아가 우리에게 한없이 떠들며 두려움을 주는데도 그 목소리를 잠재울 능력이 없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인정해야 합니다. 우리는 뱀에게 계속 물립니다. 뱀의 입을 막을 수 없습니다. 
 
내가 자아의 목소리를 끊으려고 노력하면 끊어질까요? 만약 그랬다면 그리스도께서 오실 필요가 없으셨을 것입니다. 
20세기에 가장 큰 영향력을 미친 환경학 최고의 고전이라 불리는 ‘레이첼 카슨’의 『침묵의 봄』은
무분별한 살충제 사용으로 파괴되는 야생생물계의 모습을 적나라하게 공개했습니다. 
 
침묵의 봄은 살충제의 무분별한 사용으로 새들이 사라져 봄이 되었는데도 새의 소리가 들리지 않는다는 이유에서 붙인 제목입니다. 
사이언스지에 따르면 최근 50년간 북미에서만 새들이 32억 마리가 감소했다고 합니다.
그 원인이 인간 때문인데, 인간으로 인한 온난화로 서식지가 파괴되고 먹이도 사라졌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살충제로 새들의 먹이인 곤충을 사정없이 죽였습니다.
문제는 그렇게 뿌린 살충제들이 조금씩 축적되어 인간의 몸으로 들어온다는 사실입니다.
인간이 귀찮은 벌레들을 죽이기 위해 쓴 살충제는 인간에게 해롭지 않은 줄 알았지만 결국 피해는 인간 자신이 본다는 것이 이 책의 주된 내용입니다.
 
우리 안에도 우리를 괴롭히는 곤충들이 있습니다. 
그 곤충들을 내 힘으로 죽이면 괴롭힘도 없고 새들도 지저귀지 않습니다.
그러나 나도 죽습니다. 
사실 나는 자아와 하나이기 때문입니다.
내가 자아를 죽인다는 것은 자살행위나 다름없습니다. 
 
우리가 평온했을 때가 있습니다. 
아빠 엄마 품에 안겨있을 때입니다.
이는 마치 바다 한가운데 떠 있는 배가 정착할 항구가 있느냐, 없느냐와 같습니다.
언제든 돌아갈 항구가 있는 배는 바다에서도 고요합니다. 
 
그러나 표류하는 배라면 생존을 위해 매우 시끄러울 수밖에 없습니다.
따라서 어렸을 때 부모의 사랑을 충분히 받지 못하면 항구 없는 배처럼 생각이 많은 사람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다고 방법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 
왜냐하면, 인간의 부모님은 자녀들의 영원한 항구는 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자녀의 죽음 뒤는 책임져줄 수 없는 불완전한 간이역이 부모입니다. 
그러니 우리는 세례자 요한을 만나야 합니다. 
 
저에게는 『하느님이시요 사람이신 그리스도의 시』가 세례자 요한이었습니다.
저를 침묵하게 하고 그리스도를 가리키는 손가락과 같았기 때문입니다. 
덕분에 이 책을 읽으면 잡념이 사라져서 잠도 잘 오고 다음 날도 주님 말씀 안에서 살아갈 수 있었습니다. 
 
김희아 씨도 마찬가지입니다. 
부모에게 버려져 보육원에서 자랐지만, 그 안에서 주님을 만났습니다.
그녀는 자신보다 자신을 보며 주님께서 더 울고 계실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면 자기를 버린 부모까지도 감사하고 사랑한다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이 됩니다.
그러기 위해 항구를 알려주는 등대인 세례자 요한이 필요한 것입니다.
김희아 씨에게는 구세군 보육원이 그 역할을 했습니다. 
 
전에 말씀드렸던 적이 있는데, 한 수녀님이 유학 와서 첫 해를 공부하고 너무 힘들어 되돌아가려고 생각하였습니다.
하지만 하느님 뜻을 알 길이 없었습니다. 
수녀님은 일주일 동안 알프스의 산자락에 있는 지인의 집에 머물며 ‘에델바이스’를 보게 해 주시면 한 해 더 해보고 아니면 돌아오겠다고 기도했습니다. 
일주일 동안 알프스를 걸으며 에델바이스만 찾았습니다.
 
그러나 꽃은 보이지 않았습니다. 
일주일이 지나고 떠나기 전날 밤에 다음 날 출발하기 위해 차 트렁크에 짐을 싣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지인이 하늘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수녀님, 저기 봐봐요!”라고 소리쳤습니다. 
 
수녀님은 눈을 들어 하늘을 보았습니다. 
그때 비가 부슬부슬 내리고 있었는데 알프스산 꼭대기에 둥그렇게 구름이 걷혀 별이 쏟아지고 있었습니다. 
수녀님은 그때 ‘아, 에델바이스가 알프스의 별이란 뜻이 있었지!’라고 깨달으며 주님께서 응답해 주셨음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학부부터 시작하여 석사까지 모두 잘 마칠 수 있었습니다. 
 
우리는 스스로 고요해질 수 없습니다. 수녀님이 알프스로 가서 산행할 때 침묵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세례자 요한이 광야로 초대한 것뿐이었습니다. 
하느님의 스케일은 인간의 그것과 비교도 되지 않습니다. 
 
광야로 불러내 그리스도를 지목하는 것까지가 세례자 요한의 역할입니다.
마치 바다의 등대와 같습니다. 
항구를 찾지 못한 배는 평화가 없습니다. 
 
세례자 요한은 우리를 항구로 이끌어 참 평화를 줍니다.
누구나 그리스도를 만나 항구에 머무는 사람은 또 누군가의 등대가 됩니다.
그리고 그 등대를 통해 항구를 발견하면 ‘감사’로 그 항구로 들어갑니다.
이것이 평화에 이르는 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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