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분만이 줄 수 있는 것을 청하세요
오늘 군중이 세례자 요한에게 묻습니다.
“그러면 저희가 어떻게 해야 합니까?”
세례자 요한은 옷을 두 벌 가진 사람은 못 가진 이에게 한 벌 나누어주고, 음식도 그렇게 하라고 합니다.
사랑실천을 하라고 하는 것입니다.
세리들도 와서 묻습니다. “스승님, 저희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요한은 정해진 것보다 더 요구하지 말라고 가르칩니다.
군인들도 “저희는 또 어떻게 합니까?”라고 묻습니다.
요한은 “아무도 강탈하거나 갈취하지 말고 너희 봉급으로 만족하여라” 하고 가르칩니다.
그런데 요한을 메시아로 아는 이들에 대해서는 이렇게 말합니다.
“나는 너희에게 물로 세례를 준다.
그러나 나보다 더 큰 능력을 지니신 분이 오신다.
나는 그분의 신발 끈을 풀어 드릴 자격조차 없다. 그분께서는 너희에게 성령과 불로 세례를 주실 것이다.”
다시 말하면 예수님은 소위 ‘사랑실천’을 말씀하시려고 오시는 분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사랑의 실천법은 세례자 요한도 알려줄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성령과 불로 ‘새로 태어나게’, 그래서 ‘새로운 존재가 되게’ 하시기 위해 오시는 분입니다.
이 차이가 너무 커서 요한은 예수님과 감히 비교될 수 없는 존재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제가 구원은 행위가 아니라 믿음에 의해 얻어지는 것이라 말하고, “그분은 우리를 하느님이 되게 하시려고 인간이 되셨다”(CCC, 460)라는 말씀을 인용해 우리가 하느님이 될 수 있다는 믿음을 가져야만 한다고 하면 많은 반대에 부딪힙니다.
감히 인간이 어떻게 하느님이 될 수 있느냐고 말합니다.
우리는 사랑을 실천함으로써 하느님처럼 되려고 노력하는 존재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랑의 실천법이 중요하다고 합니다.
하지만 오늘 복음에서 사랑의 실천법을 알려주는 수준은 세례자 요한이지 그리스도가 아니십니다.
그리스도의 세례는 믿음을 주는 것입니다.
인간의 힘으로 하는 사랑실천은 한계가 있습니다.
이 한계를 넘는 유일한 방법은 사랑할 수 있는 존재로 새로 태어났음을 믿는 것뿐입니다.
예수님은 그런 능력을 갖추고 오십니다.
그 능력을 믿느냐, 안 믿느냐에 따라 내가 어떤 사람이 되느냐가 결정됩니다.
내가 어떤 존재라고 믿느냐가 나에게서 하느님 사랑의 본성이 나오느냐, 나오지 않느냐가 결정됩니다.
허준과 같은 경지에 오른 사람에게 감기를 빨리 낫는 비법을 묻는다면 그것은 오히려 허준을 무시하는 처사입니다.
마찬가지로 세례자 요한에게 물어도 될 것을 예수님께 물으면 안 됩니다.
예수님은 더 높은 것을 주러 오셨습니다.
영화 ‘남자사용설명서’(2013) 내용입니다. 최보나는 광고회사에서 5년째 조감독 일을 하는 여자입니다.
그런데 동료들은 그녀를 여자로 봐주기는커녕 무시하고 구박하고 이용합니다.
그녀 자신도 그런 대우가 어쩌면 당연하다 여깁니다.
그런데 어느 날, 해변 촬영지에서 이승재를 만납니다.
이승재는 과거에 최보나가 감독인 줄 알고 깍듯하게 인사했었는데 지금은 온갖 허세와 잘난 척을 하는 모습에 기분이 나빠졌습니다.
자신만 정체되어 있는 느낌을 받은 것입니다.
보나는 해변에 외로이 혼자 남아있다가 모래사장 위에서 잠이 듭니다.
회사 동료들이 그녀를 신경 쓰지 않고 다 돌아가 버린 것입니다.
한밤중에 추워서 일어난 보나는 주변을 돌아보던 중 잡화 물건이 가득 실린 트럭을 발견합니다.
무엇에 이끌린 듯 그 트럭으로 향했는데 그 트럭에서는 누구든 따라 하기만 하면 인생을 바꿀 수 있다는
수많은 비디오를 판매하고 있습니다. 아무 생각 없이 ‘남자사용설명서 비디오’ 꾸러미를 삽니다.
우연히 보고 잠든 내용을 다음 날 아침부터 우연히 써먹으니 이상하게 정말 먹히는 것입니다.
그녀는 지금까지 너무 까칠하게만 살아왔는데, 필요에 따라 사과하고 웃어주고 거리를 좁히는 등의 절차를 따라 하면서 여러 위기를 모면합니다.
회사와 남자와 세상의 인정을 받아갑니다.
이렇게 남자사용설명서를 완벽하게 익혀가면서 그는 승재의 사랑도 얻습니다.
하지만 이승재는 보나의 집에서 그녀가 비디오테이프를 보고 자신에게 그대로 한 것을 알게 됩니다.
그리고 이용당한 느낌에 그녀를 떠납니다.
그녀는 승재에게 진심을 말해보려 했지만 실제로 정말 비디오의 가르침대로 행동한 것은 사실이기에
승재는 그 사과를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비디오의 마지막은 가르침은 이것입니다.
“남의 시선을 신경 쓰지 말고 그냥 앞으로 나아가라.”
자신의 능력을 믿으라는 말입니다. 처음에는 행동을 고쳐주고 사람들을 이용하는 실천방법을 알려주었지만,
나중에는 그냥 자신을 믿고 앞으로 나가다 보면 자신에게 합당한 일들이 일어난다는 것입니다.
결국, 자신을 믿고 자신의 능력을 믿고 자신의 소중함을 믿기만 하면 된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왜 굳이 그 전에 오랜 시간의 행동 실천법이 나왔던 것일까요? 이는 자신을 믿게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하면 된다는 것을 믿게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보나는 마음을 다잡고 하기만 하면 된다는 자존감으로 일에 충실합니다.
그러자 자신을 좋아하는 사람도 많이 생기고 일도 승승장구합니다.
이렇게 되자 승재는 그녀의 당찬 모습에 다시 끌립니다.
보나가 승재를 향해 무엇을 한 것도 아닌데 승재는 보나를 다른 사람에게 빼앗길까 봐 인기배우라는 타이틀을 벗어던지고 만인 앞에서 그녀에게 사랑을 고백합니다.
누군가가 나를 좋아하게 만드는 것은 내가 그 사람에게 하는 행동이 아닌 사랑을 받을 만하다는 자존감입니다.
요한과 그리스도를 비디오에 비유하기는 차마 못 할 일이지만, 그래도 세례자 요한이 행동을 지정해주고
그다음에 예수님께서는 자존감을 주는 방법 면에서는 보나가 배운 비디오와 같은 역할과 방향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아브라함의 종이 이사악의 신붓감을 고를 때 자신과 낙타에게 물을 길어주는 여인을 찾았습니다.
그만큼 사랑의 실천에 익숙한 사람을 찾은 것입니다.
아브라함의 종은 그 사랑의 실천이 비록 인간적이기는 하나 그것 자체로 그 여인이 사랑을 향해 나아가고 있고
하면 할 수 있다는 자존감도 지니고 있음을 안 것입니다.
종은 여인을 이사악에게 보내고 이사악은 그녀와 하나가 됩니다. 이사악은 여기서 그리스도를 상징하는데
교회를 상징하는 레베카와 한 몸이 된 것입니다.
교회는 사랑의 실천이 행복임을 알아 그 실천에 노력하는 이미 세례자 요한을 만난 사람들이
그리스도와 한 몸을 이루는 장소입니다.
하지만 세례자 요한이 지정해주는 사랑의 실천만을 가지고서는 사랑받는 사람이 되기는 불가능합니다.
내 있는 그대로 행동해도 사랑받을 가치가 있는 사람이고 그것이 사랑 자체라는 믿음이 있어야 합니다.
그러려면 그리스도와 한 몸임을 믿어야 합니다.
사랑은 하느님의 본성인데, 본성은 자신이 그 본성임을 믿는 이에게서만 나옵니다.
아무리 인간이라도 늑대에게 키워지면 늑대라고 믿고 그러면 인간의 본성이 아닌 늑대의 본성이 나옵니다.
하느님이 사랑이십니다.
그러면 우리가 사랑이 나오게 하려고 자기 자신을 무엇이라 믿어야 하는지 명확해집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당신과 한 몸이 될 수 있어서 하느님을 아버지라 부를 수 있는 존재가 되게 하시려 세상에 오신 것입니다.
그런 분에게 사랑의 실천만 묻는 것은 오히려 무례한 일입니다.
그러나 현대에도 여전히 요한을 메시아로 여긴 사람들처럼 메시아를 요한 수준으로 깎아내리는 일이 많습니다.
기껏 예수님께 와서 새로 태어날 생각은 안 하고 사랑의 실천방법만을 묻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메시아를 당신 신발 끈을 묶어드릴 자격조차 없는 수준의 사람으로 떨어뜨리는 일입니다.
그분의 능력에 합당한 것을 청할 수 있어야 그분을 공경하는 것입니다.
그 사람의 능력에 합당한 것을 요구하십시오.
그것이 그 사람을 알아보는 눈이 있음을 증명합니다.
나의 자존감을 주는 정체성을 확고히 믿게 할 믿음을 청하는 것이 주님께 가장 합당하고 기쁘게 받아주실 청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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