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들여지는 사람은 길을 내지 못한다. 지금의 행복에 길들지 않기를.
오늘 복음엔 세례자 요한의 직무가 소개됩니다.
메시아가 오시기 전에 그분의 길을 미리 닦아놓는 역할입니다.
이를 “죄의 용서를 위한 회개의 세례”라고 합니다.
‘회개’란 무엇이 행복인지 아는 것입니다.
술을 지나치게 많이 마시는 사람이 회개했다고 하면 이제 술을 덜 마시는 것이 행복임을 안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집을 나온 아이가 회개했다고 하면 그래도 집에서 부모님과 사는 것이 행복임을 안 것입니다.
박보영 목사가 안성에서 있을 때 길거리 아이들을 데리고 살았습니다.
그런데 한 달 뒤에 아이들은 다시 밖으로 나가고 싶어진다고 합니다.
그러면 목사님은 아이들이 길거리에서 살 때 입었던 더럽고 냄새나는 옷을 다시 줍니다.
그리고 입어보라고 합니다.
그러면 아이들은 코를 막고 억지로 입고는 자기들 손으로 내다 버리고 샤워를 두 시간씩 합니다.
그리고 다시는 길거리로 나갈 생각을 하지 않습니다.
이것이 회개입니다.
만약 그리스도와 함께 사는 것이 그리스도 없이 사는 것보다 더 행복하지 않으면 회개한 것이 아닙니다.
회개하지 않으면 간신히 주일미사에 나오기는 하겠지만 일상을 살아갈 때는 그리스도께서 동행하심을 까맣게 잊고 삽니다.
아담과 하와가 그랬습니다.
그들도 하느님의 현존을 느끼며 살기보다는 뱀의 뜻에 따라 세속-육신-마귀의 욕구를 채우는 것을 더 행복으로 여겼습니다.
회개는 그리스도를 부릅니다.
세례자 요한은 이런 회개의 세례를 선포하는 것입니다. 돈도 없고 먹고 마실 것도 없고 명예도 없는 광야에서 사는 것이 더 행복임을 전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렇게 삼구를 포기할 때 하느님의 어린양을 만나기 때문입니다.
도시에서 광야로 나오지 않으면, 곧 삼구를 포기하지 않으면 그리스도를 만날 수 없습니다.
그분은 사랑이신데 삼구는 사랑과 반대되는 욕구이기 때문입니다.
이는 불과 물처럼 한 공간에 공존할 수 없는 욕구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와 함께 머무는 것이 세상 즐거움을 다 포기하는 것보다 행복함을 믿지 못한다면 누가 광야로 나오겠습니까?
이것을 보여주기 위해 먼저 그 길을 간 사람이 필요한데, 그 사람이 세례자 요한입니다.
일단 믿고 광야로 나와 그리스도를 만난 사람은 ‘회개의 세례’를 선포하는 사람이 됩니다.
왜냐하면, 그 사람의 삶 자체가 무엇이 행복인지 증명하는 삶이기 때문입니다.
마더 데레사의 삶이 그랬고 이태석 신부님의 삶이 그랬습니다.
이분들의 삶을 보며 많은 사람은 ‘저런 삶이 진짜 행복일 수도 있겠다!’라고 생각하고 그 광야의 삶으로 나아올
결심을 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이분들이 회개의 세례를 선포하는 삶을 살게 된 가장 큰 원인은 이분들이 먼저 세상의 행복에 길들지 않은 누군가를 만났다는 데 있습니다.
이렇게 회개의 세례는 먼저 그 길을 간 사람이 가지 못한 사람에게 길을 내주는 것입니다.
실화를 바탕으로 만든 ‘히말라야’(2015)는 엄홍길 대장과 박무택과의 우정을 그립니다.
엄홍길 대장으로부터 산을 배우고 싶었던 박무택은 지옥훈련을 거쳐 엄홍길 대장과 극한의 어려움을 견뎌내며 둘도 없는 친구가 됩니다.
그런데 엄홍길 대장은 세계 최초 16좌 등정을 코앞에 두고 더는 산을 타서는 안 된다는 진단을 받게 됩니다.
이에 박무택이 대장이 되어 에베레스트를 등정합니다. 이 과정에서 박무택 대장은 동료들을 구하려다 조난당합니다.
폭풍이 몰아치는 악천후에 베이스캠프에 있었던 어떤 누구도 그들을 구하러 오르지 않았습니다.
책도 쓰며 가족과 삶을 즐기고 있었던 엄홍길 대장은 이들 시신을 수습하기 위해 마지막 산을 오르기로 합니다.
그러나 많은 사람이 쓸데없는 도전이라며 말립니다. 명예가 따르지 않는 도전이기 때문입니다.
산을 오르는 것이 아니라 시체를 찾는 도전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자신의 후배를 추운 그곳에 홀로 둘 수 없었던 엄홍길 대장은 아픈 다리에도 그들의 시신을 찾아 내려옵니다.
어떤 명예도 없는 도전. 다만 우정을 지키기 위한 두 달이 넘는 도전이었습니다.
이것을 계기로 엄홍길 대장은 박무택 대장과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16좌 등반을 완주합니다.
살다 보면 현실에 안주할 것인가, 아니면 새로운 길을 낼 것인가의 선택이 참으로 많이 찾아옵니다.
이때 현실에 안주하는 삶은 아무런 길도 내지 못하지만, 현실과 타협하지 못하는 성격을 지닌 사람은 새길 냅니다.
그런데 그 길이 이 세상으로 내려오지 못하는 그리스도를 세상으로 내려오게 만드는 길이 됩니다.
길을 내는 사람들의 특징은 지금 여기에 길들여지지 않는다는 데 있습니다.
그리고 그 길들여지지 않는 이유는 더 높은 것을 추구하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항상 이렇게 묻습니다.
“이것이 최고의 행복인가?”
이 질문에 만족하지 못하는 이들이 길을 개척합니다. 그리고 궁극적으로는 그리스도를 만나게 됩니다.
영화 ‘메이즈 러너’(2018)는 실험용으로 기억이 삭제되어 한 공간에 갇혀 살아야 하는 젊은 청년들의 이야기입니다.
여기에서 토마스만이 길을 알 수 없는 미로와 무서운 괴물을 무릅쓰고 그곳을 탈출하려 합니다.
그리고 그를 따르는 이들이 있는가 하면 또 자신들의 세상에서 계급을 정하고 살아가는 이들도 있습니다.
이 둘의 투쟁은 끝이 없습니다.
다만 희생이 따르더라도 나가는 길을 찾게 된 토마스는 다른 이들도 그곳을 빠져나올 수 있게 해주는 길을 만들어줍니다.
‘죽은 시인의 사회’에서 키팅 선생님은 세상의 틀에 갇혀 사는 학생들에게 책상 위로 올라와서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왜 이 위에 섰을까? 이 위에선 세상이 무척 다르기 보이지. 잘 알고 있는 거라도 다른 시각에서 봐라.
틀리거나 바보 같아도 반드시 시도해라.”
키팅 선생님이 쫓겨나자 학생들은 교장 선생님의 위협에도 책상 위로 올라섭니다.
누군가 길을 내주지 않으면 아무도 새로운 세상을 만날 수 없습니다.
지금 세상이, 그리고 대부분이 쫓고 있는 돈이 왜 행복의 정답이라고 생각하십니까?
다 이해할 수 없다면 행복할 수 없다고 여기십시오.
그래서 행복에 대해 다 알고 싶어 하는 사람이 생기면 그 사람은 결국엔 주님의 길을 고르게 하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남들이 하니까 다 따라 해서는 안 됩니다.
세례자 요한은 다른 사람이 다 행복이라고 말하는 것에서 벗어나 그것과 반대되는 광야의 삶에서 행복을 찾았습니다.
지금의 행복이 최선인지를 끊임없이 물었기 때문입니다.
내가 행복을 위해 찾아간 그 길로 그리스도께서 내려오십니다.
그리고 그 길은 다른 이들이 그리스도라는 행복을 만나게 하는 축복의 통로가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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