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연은 무책임과 우울함을, 필연은 책임과 기쁨을.
오늘은 성 안드레아 사도 축일입니다.
복음 말씀은 예수님께서 어부였던 네 명의 사도들을 뽑으시는 내용입니다.
그중에 안드레아가 있습니다.
안드레아 사도는 요한과 함께 예수님의 첫 제자였습니다.
처음엔 세례자 요한의 제자였다가 세례자 요한이 예수님을 “하느님의 어린양”으로 소개하는 말을 듣고는 곧바로 그를 따라가 제자가 되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그때에 예수님께서는 갈릴래아 호숫가를 지나가시다가 두 형제, 곧 베드로라는 시몬과 그의 동생 안드레아가 호수에 어망을 던지는 것을 보셨다.”라고 시작합니다.
얼핏 보면 예수님께서 ‘우연히’ 거니시다가 그들을 발견한 것처럼 묘사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정말 예수님은 아무 생각 없이 다니시다가 우연히 제자들을 부르신 것일까요?
예수님은 생각 없이 행동하시는 분이 아니십니다. 요한과 안드레아는 그런 분임을 알고 있었고 비록 그렇게 보이더라도 이는 우연이 아니고 필연적인 부르심임을 믿고는 이렇게 행동합니다.
“그러자 그들은 곧바로 그물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랐다.”
나에게 일어나는 일을 필연으로 여기면 ‘책임’이 따릅니다.
따라서 신앙을 가지려면 모든 것을 주님 뜻으로 여겨 그 책임을 감당할 수 있는 사람이 되는 게 우선입니다.
예수님께서 당신의 제자로 쓰시는 이들에게 하시는 첫 번째 일은 ‘우연은 없다’라는 것을 알려주시는 일입니다.
그래야 당신이 우연처럼 부르시는 것에도 생명을 걸고 나서기 때문입니다.
저도 뒤돌아보면 태어나서 첫 기억인 할머니의 돌아가심이 저에게는 ‘행복’을 찾는 시작이었고,
우연히 접하게 된 『하느님이시요 사람이신 그리스도의 시』가 행복은 주님을 따름에 있음을 알게 하여 사제가 되기로 하게 된 것도 실제로는 우연이 아니었음을 알게 됩니다.
이렇게 보면 하느님의 속성 안에는 ‘우연’이란 없습니다.
어떤 어머니가 자녀에게 하는 일이 우연일 수 있습니까?
우연이 자녀를 임신하고 우연이 낳고 우연히 기르는 어머니는 없습니다.
자녀를 사랑하면 자녀가 비록 어머니가 우연히 자신에게 해 주는 것처럼 보일지라도 실제로는 어머니의 관심과 사랑이 담긴 필연입니다.
아이가 어머니가 나에게 해 주신 말이 우연이라고 느끼면 그것은 은총이 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 말씀이 필연으로 다가오면 아이는 그 말씀 때문에 자신에 대한 책임 있는 결정을 내려야 합니다.
어머니께서 제게 “엄마는 자녀를 일곱 살까지만 키워주는 거다. 앞으로 네가 잘 돼도 네가 잘해서 잘 된 것이고 다쳐도 네가 잘못해서 다친 것이다.”라고 말해주신 것이 그냥 우연히 말씀하신 것이라고 여겼다면 저는 지금의 저의 모습이 아닐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 말씀을 우연히 하신 말씀이 아니라 필연적으로 해 주신 말씀으로 들었기 때문에 어렸을 때부터 제 인생에 책임을 지려 살아왔고 그것이 저에게 자존감을 주고 저를 성숙시켜 왔음을 알기 때문입니다.
그 결과는 어떨까요? 기쁨입니다.
『죽고 싶은 사람은 없다』라는 책을 쓴 임세원 교수는 2018년 12월 31일 조울증 환자가 휘두른 칼에
안타깝게 돌아가신 의사이십니다.
이분은 피할 수 있었으나 간호사가 위험할까 봐 나와서 피하라고 하다가 그런 변을 당하였습니다.
이분이 가장 싫어하는 말이 있었다고 합니다. “선생님은 우울증이 무엇인지 몰라요.”
그렇게 오래 공부하고 많은 환자를 접했는데 그것을 모른다고 환자들이 말하면 힘이 빠지고 화까지 났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임 교수에게도 우울증이 찾아왔습니다.
몸에 원인 모를 통증이 찾아오고 일상에서 기쁨을 느끼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자살 시도를 합니다.
소주 두 병을 사서 한 병은 먹고 반병은 몸에 뿌리고 반병은 차에 둔 채 다리 난간을 들이받고 떨어지는 것입니다.
그렇게 다 계획하고 실행하려는데 차 열쇠가 없는 것입니다. 열쇠를 찾으려고 집으로 들어갔을 때
잠자는 아이들을 보고는 한없이 울고 다시 살아보자, 나에게 기회를 다시 주자는 마음으로 3년 정도의 극한 우울증을 극복해내었습니다.
이분이 우울증이 오는 원인을 ‘왜?’라고 찾았습니다. ‘나에게 왜 이런 일이 일어나지? 왜 우리 자녀만, 우리 부모만?
다른 사람들은 죄짓고 잘도 사는데…?’ 등의 물음에 해답을 할 수 없을 때, “그냥!”이라는 해답을 주면
이것들이 쌓여서 무기력해지고 우울해진다는 것입니다.
직접 우울증을 극복해본 분이라 맞는 말일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을 극복하는 일은 지금, 이 순간에 일어나는 일, 하루하루를 적극적으로 살아보자는 노력입니다.
명상하고 운동하고 일찍 자고 일찍 일어나며 사람들을 만나는 등의 일상에 의미를 부여하는 것입니다.
결국, 지금 일어나는 일들이 우연이라고 여기면 지금 내가 할 일은 없어지지만 그것이 삶을 우울하게 하는 것입니다.
이 모든 일이 다 주님께서 주시는 필연이라고 여기면 얼마나 좋을까요?
2000년 중국 산둥성에서 한 남자가 의료 사고로 뇌사상태가 된 아내를 극진히 간호해 8년 만에 깨어나게 한 일이 있었습니다.
아직 몸이 움직일 수 없는 상태였지만 2008년 장 씨의 아내는 임신하게 됩니다.
의사들은 한결같이 아기를 낳으면 산모의 생명이 위험하다고 경고했습니다.
그들에게 아내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남편이 죽어있는 저를 살려주었습니다.
제가 남편에게 보답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이 이것입니다.”
다행히 건강한 딸을 출산했고 산모도 무사할 수 있었습니다.
장 씨는 아내와의 결혼을 우연이라 여기지 않았습니다. 그러면 책임이 따릅니다.
모든 것을 버려야 합니다.
그러나 결국은 그런 믿음이 축복이 되었습니다.
아마 이 결혼이 우연이라 여기고 다른 사람을 만나 살았어도 지금만큼 행복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모든 것을 필연적이라 여기면 희생해야 할 것도 생깁니다.
그러나 결국 그것이 나에게 축복이 됩니다.
하느님께서 그것을 필연으로 믿는 이에게 축복을 주시기 위해 매 순간 준비하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어머니는 저에게 그냥 우연히 말씀하신 것이라 하십니다.
그러나 그 안에는 사랑이 담겨있었고 저는 사랑이 담겨있는 어머니 말씀과 행동에는 우연이 없다고 믿었습니다.
사랑하는 사람 사이에서는 우연이 없습니다.
그래서 책임있는 삶을 살아야 했지만 그것이 기쁨이 되었습니다.
우리는 결정해야 합니다. 지금 일어나는 일을 그냥 우연으로 해답 없이 넘길 것인지, 아니면 필연으로 믿고 응답할 것인지. 안드레아 성인도 엑스 십자가에 매달려 죽어가는 동안도 며칠 동안 설교를 하며 단 한 명이라도 더 회개시키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그 순간도 필연으로 본 것입니다.
그리고 그 필연은 자신과 이웃에게 축복이 되었습니다.
우리가 우연이라고 믿는 것은 축복에서 제외되지만
필연적이라 믿는 것은 모든 것이 축복이 됨을 잊지 말아야겠습니다.
(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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