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월27일 [연중 제34주간 토요일]
루카 21,34-36
심판 때 그리스도 앞에 설 힘은 기도로 얻은 내가 죽고 그리스도가 되었다는 믿음
오늘 복음에서 종말의 긴 말씀 가운데 마지막 당부가 나옵니다.
“너희는 앞으로 일어날 이 모든 일에서 벗어나 사람의 아들 앞에 설 수 있는 힘을 지니도록 늘 깨어 기도하여라.”
우리 대부분은 마지막 때에 하느님 앞에 설 힘이 있을 것이라 믿습니다.
그러나 쉽지 않을 것입니다.
그 힘은 곧 그분의 뜻을 따랐느냐에 의해 생겨납니다.
중동에서 남편들이 나가 돈을 보내줄 때 아내들은 두 부류로 나뉘었습니다.
아껴 쓰면서 자녀를 잘 키워 몇 년 만에 남편이 돌아올 때 기쁘게 김포공항에 나가는가 하면, 어떤 자매들은 남편이 돌아올 때 도망을 치거나 자살을 했습니다.
그 돈을 제비에게 다 가져다 바치고 빚까지 졌기에 남편을 볼 면목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형제를 사랑했다고 주님 앞에 설 수 있을까요? 야곱은 장자권을 받아 구원에 이수 있다고 확신했습니다.
그러나 20년 동안 많은 고생을 했음에도 감히 에사우 앞에 나설 힘이 없었습니다.
그동안 세상에서 자신이 낳은 자녀들과 모은 재물들을 먼저 선물로 보냈지만, 여전히 에사우 앞에 설 자신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혼자 남아 ‘기도’하였습니다.
이것이 천사와의 씨름으로 표현된 것입니다.
천사는 축복을 청하며 밤새 자신을 놓아주지 않는 야곱의 정강이뼈를 부러뜨리고 그의 이름을 바꿔주었습니다.
이름을 바꾸었다는 말은 새롭게 태어났다는 말이고 새 정체성이 생겼다는 말입니다.
정강이뼈가 부러졌다는 말은 더는 남자 구실을 하지 못하게 되었다는 말입니다.
죽었다는 말입니다.
기도는 내가 죽고 그리스도로 새로 태어나는 것입니다.
마지막 때에 주님 앞에 서는 힘은 “내가 죽고 그리스도로 산다”라는 믿음입니다.
사람 앞에 설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내가 살아 있으면 누구의 앞에도 설 용기가 나지 않습니다.
나는 사랑으로만 죽는데 부모로부터 사랑을 많이 받지 못한 이들은 자아가 강해서 남들 앞에 잘 서지 못합니다.
유일하게 의지하고 있는 자아가 상처받을까 두렵기 때문입니다. 무대 공포증과 같은 것입니다.
사람들 앞에 서는 것이 두려운 이유는 자아가 살아 있어서 잃을 것을 걱정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하느님을 알게 되면 하느님의 사랑으로 부모가 죽여주지 못한 자아까지 죽일 수 있습니다.
그러면 비로소 누군가의 앞에 설 힘이 생깁니다.
나 대신 그리스도께서 나서주신다고 믿으면 사람들 앞에 설 수 있고 하느님 앞에도 설 수 있습니다.
조두순 사건을 바탕으로 만들어진 영화 ‘소원’에도 같은 내용이 나옵니다.
소원이네 문방구, 그리고 공장에서 열심히 일하는 아빠, 이들은 그 끔찍한 사건이 일어나기 전에는 평범하고 단란한 가정이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소원이는 늦게 학교에 가게 되고 아저씨가 우산을 씌워달라는 청을 거절할 수 없었던 소원이는 돌이킬 수 없는 상처를 안고 살아가게 됩니다.
소원이는 우산을 씌워준 것이 누구에게도 말할 수 없는 부끄러운 일이 되어버렸고 자신에게 상처만 주는 세상과 담을 쌓습니다.
아빠가 들어와도 이불을 뒤집어쓰고 말을 하지 않습니다.
아빠도 세상에 속한 한 남자가 되어버린 것입니다. 호스를 낀 옆구리로 변이 새어 나와서 그것을 닦아주기 위해 바지를 벗기려는 아빠를 거부합니다.
그런데 아빠 말고는 아이의 상처를 치유해 주어 세상과 소통하게 할 사람은 없습니다.
아빠는 소원이가 냉장고 나라 코코몽을 좋아하는 것을 알고는 코코몽 인형 안으로 들어가 소원이와 친해지려 합니다.
소원이는 코코몽을 좋아합니다.
공장에서 일하다가도 점심시간에 소원이만 볼 수 있는 곳에서 땀을 뻘뻘 흘리며 코코몽 인형 속에서 소원이를 응원합니다.
소원이는 코코몽이 보이면 그 무시무시한 학교 앞길도 힘 있게 걸을 수 있습니다.
소원이는 코코몽이 지켜주기에 학교도 갈 수 있고 남자친구들과도 이야기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아빠는 그것으로 만족이었습니다.
그러나 소원이는 바보가 아니었습니다.
그 코코몽이 아빠인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소원이는 아빠를 조금씩 받아들이면서 세상도 용서하고
받아들이고 있었던 것입니다.
아빠의 희생 덕분으로 잃어버렸던 말도 되찾아 말을 하게 되고 아이들과도 이전처럼 지낼 수 있게 되었습니다.
어느 날 소원이는 자신을 쫓아다니는 코코몽에게 다가와 인형 얼굴을 벗기고 아빠의 땀을 닦아줍니다. 아빠는 눈물을 흘립니다.
사실 우리도 같은 상황입니다.
상처받아 자아가 커진 상태입니다.
그래서 세상 사람들을 만나는 것도 조심스럽습니다.
그러나 기도를 통해 주님께서 동행해주심을 믿으려 합니다.
그리고 그렇게 동행해주시는 하느님의 땀과 피를 봅니다.
그리고는 그분의 품에 안길 수 있습니다.
이것이 기도의 과정입니다.
이렇게 주님께 나아갈수록 상처받은 나는 사라집니다. 죽는 것입니다.
마치 태양으로 다가가는 것처럼 주님께 다가갈 때 나는 타버립니다.
그렇게 나도 하느님의 인형 속으로 들어가 누군가에게 다가갑니다.
이제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사시는 것이기에
타인이 나를 모욕하고 상처 주어도 크게 두렵지 않습니다.
나에게 하는 것이 아니라 그 모든 것을 주님께서 다 받아주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기도는 이 믿음을 증가시켜 줍니다.
결국, 야곱이 에사우 앞에 서는 힘은 기도로 내가 죽고 에사우에게 속한 사람임을 고백할 수 있을 때 가능했습니다.
야곱은 에사우에게 일곱 번 절하며 다가갑니다.
그리고 그의 얼굴을 보며 하느님의 얼굴을 뵈옵는 것과 같음을 고백합니다.
마치 마지막 만찬상에서 요한이 예수님께 그랬던 것처럼 에사우에게 안기고 그의 땅에서 살 수 있게 됩니다.
소원이가 아버지의 땅에서 살 수 있게 되었을 때 세상 사람들과도 소통할 수 있게 된 것처럼, 하늘나라에서도 하느님 품에서 살 수 있게 될 때 하늘나라 백성들과도 소통할 수 있게 됩니다.
형제들이 서로 사랑하는 것은 부모를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도 기도로 하느님을 사랑하여 나를 죽이고 마치 어린아이처럼 그분 품에 안겨있어야만 살 수 있는 존재가 된다면 마지막 때에 그분께서 나타나실 때 십자가를 거친 요한이나 마리아 막달레나처럼 숨는 일 없이 기쁘게 그분께 엎드려 그분 품으로 달려들게 될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해야 할 유일한 일이 있다면 바로 그분 앞에서 설 힘을 얻기 위해 기도하여 자기를 죽이는 것뿐입니다.
자기를 죽이기 위해서는 하느님의 사랑을 인정해야 합니다.
소원이가 아빠의 사랑을 인정했듯이. 이것이 기도의 목적입니다.
(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