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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묵상

11월 10일 _ 전삼용 요셉 신부

작성자 : 관리자 작성일 : 2021-11-10 조회수 : 1507
11월10일.[연중 제32주간 수요일]
 
루카 17,11-19
 
청하는 것은 다 들어주신다는 믿음만으로는 부족하다
 
오늘 복음은 ‘감사’의 중요성에 관한 내용입니다. 
나병 환자 열 사람이 예수님께 치유를 받았지만, 예수님께 돌아와 감사를 드린 사람은 사마리아사람 한 명밖에 없었습니다.
다른 사람들은 예수님께 감사하지 못해서 ‘믿음’이 없음이 증명되었습니다. 
 
그렇지만 그들이 완전히 믿음이 없었던 사람들일까요? 그들도 예수님으로부터 치유를 청할 믿음이 있었습니다.
그런 믿음이 있었는데도 예수님은 오직 감사하는 사마리아사람에게만 믿음이 있다고 하시고 구원에 다다랐다고 하십니다. 
 
우리는 믿음도 단계가 있음을 알아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열역학 법칙에 따라 우리 믿음도 측정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열역학 법칙은 0부터 3 법칙까지 4단계로 되어 있습니다. 
 
열역학 제0 법칙은 무엇이냐면 에너지는 많은 쪽에서 적은 쪽으로 이동한다는 법칙입니다.
뜨거운 물과 차가운 물이 있을 때 뜨거운 물은 저절로 차가운 물에 열을 빼앗깁니다.
이것을 믿는 것이 첫 번째 단계입니다.
 
우리는 주님께서 우리에게 무언가 주실 수 있기에 청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기적을 본인 의지가 아니라 빼앗기실 수밖에 없으셨던 것일까요?
어쩔 수 없습니다. 당신이 만드신 법칙이기 때문입니다.
 
열두 해 동안 하혈병을 앓던 여인은 예수님의 옷자락에 손을 대었는데 피가 멈추었습니다.
에너지를 회복했던 것입니다.
부모는 어쩔 수 없이 자녀에게 살과 피를 내어줄 수밖에 없습니다. 창조하였기 때문입니다.
아홉 명의 나병 환자들의 믿음은 여기까지였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열역학 제1 법칙으로 넘어가야 합니다.
열역학 제1 법칙은 에너지를 누군가 얻었다면 누군가는 빼앗겼다는 뜻입니다.
부모가 자녀를 성장시키기 위해 고생하듯, 하느님도 고생하십니다. 십자가를 지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에너지는 곧 당신의 살과 피입니다.
만약 아홉 명의 나병 환자들이 자신들을 치유해 준 은총이 곧 예수님께서 나병에 걸리시는 것임을 알았다면 그분께 감사를 드리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우리 나병을 치유해주시기 위해 주시는 성체가 곧 그분의 죽음임을 안다면 우리가 어떻게 감사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그들은 열역학 제1 법칙, 곧 그리스도께서 그들을 고쳐주시기 위해 지셔야 했던 십자가의 무게는
깨닫지 못했던 것입니다. 
이것을 깨달은 사람이 오늘 사마리아 사람입니다.
사마리아사람은 예수님께 감사드릴 줄 알았기에 그분이 십자가를 이해한 사람입니다. 
 
그런데 그 위 단계도 있습니다. 
바로 열역학 제2 법칙입니다.
이 법칙은 아무리 은총과 에너지를 받았어도 시간이 지나면 계속 빠져나간다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은 규칙적으로 예수님의 십자가에서 흘러나오는 선물을 받기 위해 다가옵니다.
규칙적인 기도를 한다는 뜻입니다. 
규칙적으로 기도하고 규칙적으로 주님께 감사하고 찬미합니다. 
 
그다음 단계도 있습니다. 
열역학 제3 법칙인데 내 안에 있는 모든 에너지가 소멸하기까지 가만히 있으면 내 존재까지 사라진다는 법칙입니다.
 
결국, 지금 나에게 존재할 수 있는 에너지를 주시는 분이 나의 창조자이시어서 그분이 아니면 나는 먼지보다 못한 존재, 아니 존재할 수 없는 존재에 불과하다는 것을 아는 것입니다.
이때 나오는 감정이 무엇일까요? 바로 찬미입니다.
나를 낮추고 그분의 전능함을 찬미하는 것이 가장 큰 믿음입니다. 
 
‘열역학 법칙’에 대치되는 종교가 ‘저절로교’입니다.
모든 것이 저절로 생겨났고 저절로 유지된다는 믿음입니다.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천문학자 요하네스 케플러는 창조자 없이 존재할 수 있는 것은 하나도 없다고 믿었습니다.
그래서 모든 것 안에 하느님의 법칙이 있음을 믿었고 남들이 소홀히 여기는 작은 차이에도 관심을 가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래서 행성들은 원이 아니라 타원으로 태양 주위를 공전한다는 발견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와 함께 천문학을 연구하는 한 친구는 창조자의 존재를 부인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열역학 법칙에 관심이 없었습니다. 
태양계란 저절로 생성된 것이며 저절로 유지되는 것이니 누가 만든 것이 아니라고 주장했습니다.
 
케플러는 그 친구에게 태양계의 모형을 실제 크기의 축소비율에 맞게 만들어 아름다운 색을 칠하고
별들이 빛을 발하며 빙글빙글 돌아가도록 하여 그 친구에게 보여주었습니다.
그것을 본 친구는 매우 감탄을 금치 못하였습니다.
 
“누가 이렇게 아름답게 만들었나?”
“아무도 만들지 않았네. 자기 힘으로 생겨나서 자기 힘으로 도는 것일세.”
“뭐야? 어서 말해봐. 어떻게 만든 사람이 없이 절로 만들어지고 돈단 말인가? 그런 일은 있을 수 없잖나?”
 
“이 친구야! 이렇게 작은 장난감도 만들어 움직이는 사람이 없다면 존재할 수 없는 것이 어떻게 이보다 비교할 수도 없이 큰 태양계가 저절로 생겨나서 저절로 움직일 수 있다고 생각할 수 있겠는가?” 
 
무신론자 친구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습니다.
믿음은 저절로교에서 벗어나 열역학 법칙을 믿는 것으로 증가합니다.
열역학 법칙은 한 마디로 ‘저절로 존재하는 것도 없고 저절로 움직이는 것도 없다.’입니다.
당연한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열역학 법칙을 믿는 사람들은 자신에게 에너지와 존재를 내어줄 존재를 찾습니다.
아기들은 열역학 법칙을 믿습니다. 
그래서 부모를 찾아서 에너지와 존재를 부여받습니다.
그렇게 부모에게 감사하며 살아갑니다. 
감사했다면 열역학 법칙을 이해했다는 뜻입니다. 
 
열역학 법칙을 이해하면 기도의 법칙도 이해합니다. 기도하면 에너지가 들어오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이고
기도하지 않는 자는 소멸한다는 것이며 기도로 주시는 그분의 에너지는 곧 그분의 십자가를 통해 온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기도하지 않을 수 없고, 감사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열역학 법칙을 먼저 믿게 되면 믿음은 저절로 성장하게 되고 감사와 찬미도 저절로 나오게 됩니다. 
 
이 모습을 보인 대표적 인물이 ‘다윗’입니다.
다윗은 주님의 계약궤를 예루살렘으로 모실 때 벌거벗고 춤을 추며 찬미하였습니다.
계약궤를 모시는 것은 자신의 머리가 되실 주님을 자신 안에 모시는 성찬례와 같습니다.
이때 자기를 버리고 낮출수록 찬미가 솟습니다.
 
다윗은 자신을 낮추는 것을 비웃던 아내 미칼에게  “나는 이보다 더 자신을 낮추고, 내가 보기에도 천하게 될 것이오.”(2사무 6,22)라고 말합니다. 
미칼은 자신을 낮추고 주님을 찬미하는 다윗을 비웃었기에 더는 아기를 낳지 못하는 저주를 받습니다. 
주님 앞에 우리가 근엄하게 앉아있어서는 안 됩니다. 
 
주님이 아니면 먼지보다도 못한 나를 존재하게 해 주시고 자아에 지배받지 않도록 나를 구원해 주신 주님이기에 지금, 이 순간 감사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것이 구원이 이르는 믿음입니다.
믿음은 얻어내서 기뻐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이 아니면 아무것도 아니기에 기뻐하는 것입니다.
이 믿음만이 구원에 이르게 합니다.
 
 
(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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