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월8일 [연중 제32주간 월요일]
루카 17,1-6
자녀들을 향한 가스라이팅, 이젠 그만!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남을 죄짓게 하는 일이 일어나지 않을 수는 없다고 하시고 하지만 그 일을 저지르는 자는 연자매를 목에 걸고 바다에 던져지는 편이 나을 것이라고 하십니다.
저로서는 우리가 자아와 원죄의 상태에서 태어나기 때문에 사탄과 자아와 그로부터 지배를 받는 사람들이
타인을 죄짓게 만드는 일은 멈출 수가 없음을 말하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자신이 마치 자아와 사탄처럼 누군가를 똑같이 죄짓게 만든다면 사탄과 마귀가 영원히 벌 받게 될
지옥으로 떨어질 것이라고 해석됩니다.
그런데 자아나 사탄은 어떻게 사람을 죄짓게 할까요?
자기를 주인으로 섬기고 의지하지 않으면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존재로 만들어버림으로써 그를 조종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런 의미로 ‘가스라이팅’이란 단어는 이를 이해하는 데 매우 유용하다 할 수 있습니다.
‘가스라이팅’은 연극에서 비롯된 말로 갖은 방법을 써서 상대를 자신에게 의존하게 만들어 자기 맘대로 조종하게 한다는 뜻을 지닙니다.
연극의 내용은 이렇습니다.
남편은 아내를 정신병자로 몰아서 약을 먹입니다. 아내를 사랑해주는 척하다가도 자신이 감추어놓은 물건들을 아내가 옮겨놓았다며 아내가 스스로 자신을 의심하게 만듭니다.
남편이 아내를 얻어 그 집으로 이사 온 이유는 그 집 위층에 자신이 보석이 탐나 살해한 노부부가 있는데
그 노부부의 보석을 아직 발견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부잣집 여자를 유혹하여 그 아랫집을 사고 밤마다 위층으로 올라가 보석을 찾았던 것입니다.
하지만 아내는 조금씩 의심을 하기 시작합니다.
남편이 올라간 뒤 정확히 10분 뒤에 자신의 방이 어두워지기 때문입니다.
당시 윗집에서 가스등을 켜면 다른 집들은 조금 어두워지는 시스템이었던 것입니다.
남편이 방으로 들어오기 정확히 10분 전에 방은 다시 밝아졌습니다.
그리고 15년 전 위층 노부부를 살해한 사람이 남편이고 남편이 자신까지 미친 여자로 만들어 보석만 찾으면 자신을 정신병원에 버려버리려고 한 것을 밝혀냅니다.
이렇듯 가스라이팅이란 상대를 자신에게 의존하게 만들어서 자신의 공범이 되게 만드는 에덴동산에서 ‘뱀’이 했던 것을 의미하는 현대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느님은 뱀에게 잘잘못을 묻지 않으십니다.
어차피 하와를 자기에게 의지하게 만들어 죄를 짓게 하였다면 그냥 마귀요 사탄일 뿐이기 때문입니다.
그들에게 더 이상의 심판은 필요하지 않습니다. 유혹자가 됨으로써 그냥 마귀로 심판받은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모든 가정에서 어느 정도는 이 가스라이팅이 일어나고 있음을 깨달을 필요가 있습니다.
부모가 뱀의 역할을 하여 자녀들을 가스라이팅하는 것입니다.
자신에게 의존하게 만들어서 자녀들을 자신들과 같은 욕망을 추구하는 죄를 짓게 만드는 것입니다.
좀 극단적인 사례이기는 하지만 『벼랑 끝, 상담』의 성적 때문에 조현병과 우울증을 동시에 앓고 있는
한 청년의 이야기입니다.
부모는 항상 싸우는 사람이었고 아이가 7살 때 엄마는 아이에게 “엄마 죽으러 간다.”라고 말하며 나가버립니다.
아이는 불안하여 엄마에게 전화하였는데 엄마는 즐거운 목소리로 곧 들어간다고 대답합니다.
엄청난 배신감을 느꼈지만 동시에 엄마가 죽지 않은 것에 대해 감사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렇게 엄마는 아이를 가스라이팅 하는 것입니다.
자기에게 종속시켜 자신이 없으면 안 되는 존재임을 각인시키는 것입니다.
그러고 나서 아이가 좋은 성적을 받아와도 찢어버리고는 그것밖에 못 하느냐며 눈물을 흘리고 웁니다.
아이는 엄마를 위해 왕따를 당해가면서 공부만 합니다.
아버지는 다른 방식으로 가스라이팅을 합니다.
신발 끈을 묶고 음식을 먹고 학교에 가는 것까지 모두 다 해 주며 아이에게 아버지가 없으면 아무것도 혼자 할 수 없게 만듭니다.
그리고는 분명 서울대 갈 아이라면 계속 부담을 줍니다.
길거리에서 노동일을 하는 사람들을 보고는 “노동자 주제에!”라고 깔보는 말을 하고, 너도 공부 안 하면 저렇게 된다는 식으로 교육합니다.
성적 외에는 아이의 생활에 대하여 완전히 무관심하였습니다.
아이는 외고에 들어가기는 하였지만, 집단 따돌림과 무시를 당하는 것을 참을 수 없었고 공부에 대한 공포감이 가중되어 결국 휴학을 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자 엄마는 저녁 식사 때 다른 집 아이들과 비교하며 너는 왜 이 모양이냐고 잔소리를 했습니다.
아이는 더는 참을 수 없다는 듯이 숟가락을 놓고 말했습니다.
“성적이 밥 먹여줘요?” “뭐?” “성적이 밥 먹여주느냐고요?” “너, 미쳤어? 지금 엄마한테 뭐라는 거야!”
엄마를 소리를 꽥 지르며 아들을 발로 찼습니다. 그 순간 머리에 무언가 번쩍이는 것을 느낍니다.
“제기랄! 그만 좀 하라고! 이 미친 아줌마야! 넌 성적이 다냐? 성적만 좋으면 내가 어떻게 돼도 상관없어?”
그는 식탁을 엎어버린 뒤 밥그릇을 벽에 던져버렸습니다.
밥그릇이 산산조각이 나며 바닥에 떨어졌습니다. “지호야, 왜 그래!”
아빠가 아들을 말렸습니다.
하지만 그는 아빠에게도 욕을 했습니다.
“왜 그래? 너는 내가 왜 그러는 거 같아? 서울대? 서울대는 너도 못 간 주제에 왜 나보고 가라 말라야! 나쁜 놈아!”
부모는 아이를 정신병원에 보내버렸습니다.
그 이후로도 착한 아이가 너무 힘들어서 잠깐 실성한 것으로 여기고 부모는 변하지 않았습니다.
아이를 절에 감금시키다시피 하고 돈을 들여 그를 공부하게 감시시켰습니다.
결과는 어떻게 되었을까요?
아이는 부모에게 한 행동 때문에 죄책감을 느끼고 꼭 유명해져야 한다는 강박에 사로잡힙니다.
특별히 누군가를 힘으로 억누르는 히틀러를 존경하고 가장 돈이 많은 사람이 되고 싶어 합니다.
그리고 현실에서는 아르바이트 두 시간 하는 것도 남들보다 못하는 이상과 현실의 괴리에서 괴로워하며 살아갑니다.
누가 아이를 죄짓게 만든 것일까요? 부모를 공경하지 못하는 아이일까요, 아니면 뱀과 같은 역할을 하는 부모일까요?
물론 그 부모도 그 부모에게 그렇게 성장하여 그렇게밖에 살 수 없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래도 이젠 끊어야 합니다.
그렇다고 무조건 맘대로 살라고 해야 할까요? 아닙니다. 유태인처럼 성인식을 치러줘야 합니다.
이것이 우리에게는 첫영성체입니다.
첫영성체를 했다면 이제 하느님의 동등한 자녀로서 자녀를 형제로 대해줘야 합니다.
옆집 아저씨, 아줌마처럼 나와 동등한 인격체이고 더는 그 사람의 “자유”를 강요하는 사람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가스라이팅은 상대의 자유를 내 뜻대로 하려는 시도입니다.
뱀이 그랬고, 마귀가 그랬습니다.
이제 첫영성체를 했다면 아이 스스로 하느님과 성모님을 부모로 여기고 그분들의 뜻과 자신의 뜻 사이에서 올바른 선택을 해나갈 수 있는 성인으로 인정해주어야 합니다.
아이가 자기 맘대로 하고 집에 들어오지 않아도 부모에게 “왜 나를 찾으셨습니까? 제 아버지가 하느님이고 제 어머니가 성모님임을 모르셨습니까?”라고 말할 수 있게 해야 합니다.
물론 이 봉헌이 지금은 매우 힘들겠지만 나중에 위 예처럼 자녀에게 칼에 맞는 것보다 낫습니다.
위 자녀도 모두 죽이고 싶은 마음에 가방에 칼을 가지고 다녔다고 합니다.
그게 부모에게 향하는 것은 시간문제입니다.
남을 죄짓게 만드는 일이 가장 많이 일어나는 곳이 바로 부모와 자녀 사이임을 명확히 인식하고 자녀를 어렸을 때부터 성인으로 대해줌으로써 몇 년 흔들리고 올바른 하느님의 자녀로 살아갈 기회를 주어야 합니다.
저는 어머니가 7살 때 그런 말씀을 해 주셔서 그때 술과 담배도 하며 화투만 치며 방학을 지냈지만 그렇게 저를 어른으로 대해주신 것이 부모님께 가장 큰 감사의 이유가 되었습니다.
어른으로 믿어주셨기 때문에 자존감이 높아졌고 아무 눈치 보지 않으며 누구에게 휘둘리지 않고 내가 결정하고 내가 책임지는 삶을 살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남을 죄짓게 만들어 맷돌을 메고 바다로 가라앉는 게 나을뻔한 그 사례가 바로 나 자신일 수 있음을
깊이 묵상해야 할 것입니다.
첫영성체 이후에는 자녀의 자유를 건들면 절대 안 됩니다.
(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