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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묵상

10월 25일 _ 전삼용 요셉 신부

작성자 : 홍보실 작성일 : 2021-10-25 조회수 : 1936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열여덟 해나 병마에 시달리며 허리를 조금도 펼 수 없었던 여인을 치유하십니다. 
문제는 그 시간이 안식일이었고 또 회당이었다는 데 있습니다.
회당장은 이렇게 분개합니다. 
“일하는 날이 엿새나 있습니다.
그러니 그 엿새 동안에 와서 치료를 받으십시오. 안식일에는 안 됩니다.”
 
당시 이스라엘 사람들은 안식일을 그저 일에서 쉬는 것만으로 여겼습니다.
하지만 예수님께는 안식일이 영원한 안식처에 드는 것이었습니다. 
바오로 사도가 이렇게 말하는 것과 같습니다. 
“하느님께서 하시던 일을 마치고 쉬신 것처럼, 그분의 안식처에 들어가는 이도 자기가 하던 일을 마치고 쉬는 것입니다.
그러니 그와 같은 불순종의 본을 따르다가 떨어져 나가는 사람이 없게, 우리 모두 저 안식처에 들어가도록 힘씁시다.”
(히브 4,10-11)
 
바오로에게 안식처는 가나안 땅이었습니다. 에덴동산입니다. 천국입니다.
그곳에 들어가려면 하느님께 순종해야 합니다.
무엇에 순종해야 할까요? 동물에게 이름을 지어주는 일에 순종해야 했습니다.
그 일이 엿새 동안 이뤄졌던 것입니다. 
엿새 동안의 창조는 동물처럼 사는 인간을 하느님 자녀로 태어나게 만들어 허리를 펴게 하는 일입니다.
그렇게 창조사업에 동참한 아담과 하와는 안식일이라는 천국에 드는 것입니다. 
 
저는 열여덟을 동물의 본성 ‘세속-육신-마귀’가 합쳐진 숫자로 봅니다.
동물의 본성을 ‘육’(6)으로 볼 때, 그 육이 세 번 합쳐지면 열여덟이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안식일을 위해 당신 심장을 뚫어 ‘진리와 은총’이 솟아 나오게 하십니다. 
 
오늘 복음에서 진리는 “여인아, 너는 병에서 풀려났다.”이고 은총은 “그 여자에게 손을 얹으셨다.”입니다. 
이 진리와 은총은 그리스도의 옆구리에서 나와 교회에서 칠성사로 행해지고 있습니다. 
 
우리는 동물의 본성에 살다가 그리스도께서 엿새간 열심히 일한 까닭으로 하느님 자녀의 이름을 지니고
허리를 펴게 되었습니다.
허리가 굽는 병은 바로 동물적 본성으로 사는 삶을 상징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도 우리 죽음을 통해 누군가의 허리를 펴게 할 수도 있고 아니면 펴있는 누군가의 허리를
굽히게 할 수도 있습니다.
이것을 따라서 그 죽음이 나를 안식으로 인도하는지 영원한 벌로 인도하는지 구분할 수 있게 만듭니다. 
 
2020년 10월 10일, 이탈리아에서는 2006년 만 15세의 나이에 백혈병으로 사망한 카를로 아쿠티스(Carlo Acutis)가 교회의 새 복자로 선포되었습니다. 
 
그의 부모님은 성당에 나가지 않았으나 카를로는 4살 때부터 성당에 다니기를 원했고 매주 고해성사를 보았습니다.
돈이 생기면 기부를 했고 왕따 당하는 아이의 편을 들어주기도 하는 착한 아이였습니다.
그런데 그는 두 달 전에 자기 죽음을 예고했습니다. 
 
그가 특별히 사랑했던 것은 ‘성체’였습니다. 
“성체성사는 내가 천국에 이르게 하는 고속도로와 같습니다.”
백혈병으로 죽기 직전 힘든 상황에서 마지막 성체를 영해 준 사제의 증언은 이렇습니다. 
 
“복도 끝에 있는 작은 병실에서 저는 어린 소년과 마주했습니다.
창백하지만 평화로운 소년의 얼굴을 보고 저는 무척 놀랐습니다.
그러한 모습은 심각한 병을 앓고 있는 환자, 특히 사춘기의 환자에게서는 찾아볼 수 없는 모습이었습니다.”
 
이렇게 성체 신심이 강했던 그는 성체 기적이 있었던 모든 곳을 다 조사하고 친구들에게 전하기를 원했습니다.
그러나 몸이 좋지 않아 웹사이트를 만들어 세계의 성체 기적들을 올렸습니다. 
 
현재 우리나라에도 『하늘나라로 가는 비단길』이란 제목으로 두 권의 책으로 엮어져 출판되었습니다.
어린 나이에 대학생 수준의 프로그래밍 실력을 쌓아 복음을 전하였기에 인터넷의 수호성인으로 칭하게 되었습니다. 
 
그가 시복을 받게 된 데는 지난 2019년에 일어난 한 기적이 핵심적인 역할을 했습니다.
보고된 바에 따르면, 만성적인 췌장 질환을 앓고 있던 브라질의 한 소년이 그의 이름으로 기도를 드리고 난 직후 감쪽같이 완쾌하여 난생처음 딱딱한 음식을 소화할 수 있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가 아플 때 고통을 교황과 교회를 위해 봉헌하였고 장기 기증을 원하였으나 이미 암이 퍼진 상태였기 때문에 불가능하였습니다.
하지만 카를로의 유해는 아주 완전하지는 않아도 15년이 지났는데도 거의 부패하지 않은 상태였고
지금은 모든 사람이 볼 수 있도록 전에 입던 옷을 입고 제단 유리관에 안치되어 있습니다. 
 
카를로는 말합니다. 
“사람은 모두 유일한 존재로 태어나지만 많은 이들이 복제품이 되어 죽습니다.”
그리고 하느님의 완전한 모습으로 변화하기 위해서는 성체만 한 것이 없다고. 
 
회개에 대해서는 이렇게 말합니다. 
“회개는 다른 것이 아니라 우리 시선을 아래에서 위로 옮기는 것을 의미합니다.
아주 단순한 시선의 움직임만으로 충분합니다.”
 
카를로 아쿠티스의 짧은 생애 동안 한 노력은 자신이 하늘을 보는 것처럼 자신의 친구들도 땅을 보지 않고
허리를 펴서 하늘을 보게 만드는 일이었습니다.
그러니 그는 안식에 들었음이 틀림없습니다.
짧았지만 여섯째 날을 살았기 때문입니다. 
 
어떤 사람은 죽을 때 사람들이 땅을 보게 만들기도 합니다. 재산 싸움을 하게 하는 경우가 그럴 수 있습니다.
진리와 은총으로, 곧 가르침과 피로 사람이 허리를 펴게 만들어야 하는데 다 그렇게 죽지는 않는다는 것입니다. 
 
한국에 첫 개신교 선교사로 들어와 순교한 토마스 선교사도 그런 인물이었습니다.
중국에서 천주교인들의 박해 소식을 듣고 자신도 복음을 전하기 위해 배를 타고 조선으로 건너옵니다.
그러나 당시 병인박해가 있을 때라 육지에 도착도 못 하고 불타는 배에서 간신히 뛰어내립니다.
하지만 결국, 그를 기다리는 자의 칼을 맞습니다. 
 
그런데 토마스 선교사는 자신을 찌르는 사람에게 야소(예수)를 믿으라며 웃으며 성경책을 건넸습니다. 
그 성경책이 무엇인지도 모르고 가져간 박춘권은 20년 후 60대 후반이 되어 다른 선교사에게 자신이 지난날 어느 서양인을 죽인 당사자라며 세례를 받습니다. 
 
그는 이렇게 회고합니다. 
“내가 서양 사람을 죽인 중에 한 사람을 죽인 것은 내가 지금 생각할수록 이상한 감이 든다.
내가 그를 찌르려고 할 때 그는 두 손을 마주 잡고 무슨 말을 한 후 붉은 베를 입힌 책을 가지고 웃으면서 나에게
받으라고 권하였다.
내가 죽이긴 하였으나 이 책을 받지 않을 수가 없어서 받아왔었다.”
 
나를 찌르는 이는 분명 땅을 바라보는 이입니다.
그에게 피와 가르침을 줌으로써 그가 늦게나마 하늘을 바라보게 한 토마스 선교사도 분명 하늘의 안식을 누릴 것임이 틀림없습니다. 
 
누구나 다 죽습니다. 오늘 하루 잠들기 전에 나는 사람들에게 허리를 펴고 하늘을 바라보게 하였는지
돈이나 명예, 세속적 성공 등을 좇게 만들어 굽히게 했는지 항상 성찰합시다.
그 하루의 마지막이 인생의 마지막이 될 때 내가 어디로 가게 될지가 결정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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