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복음에서는 주님의 종, 특별히 사제들이 깨어있어야 하는 방법에 대해 말씀하십니다.
사제들이 깨어있는 방식은 이것입니다.
“주인이 자기 집 종들을 맡겨 제때에 정해진 양식을 내주게 할 충실하고 슬기로운 집사는 어떻게 하는 사람이겠느냐?
행복하여라, 주인이 돌아와서 볼 때에 그렇게 일하고 있는 종!”
사제에게 부제가 필요한 이유는 사제가 ‘기도와 말씀 봉사’에 충실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러니 형제 여러분, 여러분 가운데에서 평판이 좋고 성령과 지혜가 충만한 사람 일곱을 찾아내십시오.
그들에게 이 직무를 맡기고, 우리는 기도와 말씀 봉사에만 전념하겠습니다.”(사도 6,4)
그러니 사제가 신자들에게 주어야 하는 양식은 ‘말씀’입니다.
말씀 안에 성체도 포함되지만, 특별히 강론준비나 교리나 성경과 같은 가르침일 것입니다.
그런데 좋은 말씀을 준비하는 것이 중요할까요, 아니면 질은 떨어지더라도 제때에 말씀을 전하는 게 더 좋을까요?
오늘 말씀대로라면 질적인 것보다 ‘때’가 더 중요하다고 합니다.
어쩌면 우리는 질 좋은 강론은 준비하다 때를 놓쳐버릴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제때마다 강론을 준비하다 보면 저절로 질도 좋아질 것입니다.
그런데 제때에 꾸준히 양식을 내어주지 못하게 만드는 최고의 적이 있습니다. 바로 내 안에 있는 ‘완벽주의’입니다.
내가 하는 일들이 완벽하지 못하다는 데서 우울감이 오고 그래서 또 우울하게 만들어 일을 지속하지 못하게 합니다.
그렇다면 끝까지 가게 만드는 방법은 무엇일까요? 내가 완벽하다는 생각을 버리면 됩니다.
영화 ‘비버’(2011)는 심각한 우울증 환자 월터 블랙과 그 가족의 이야기입니다.
내용 전체를 이야기할 필요는 없어 보입니다.
그냥 한 가정의 아버지가 자살 직전에서 다시 일상으로 돌아오는 내용입니다.
월터는 우울증을 극복하기 위해 갖은 방법을 다 썼지만 나아지지 않습니다.
그래서 회사도 망해가고, 가족 관계도 파탄이 납니다. 자살도 실패할 정도입니다. 되는 게 없습니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모든 일이 잘 풀립니다.
가족과의 관계도 다시 회복되고 아이디어가 보이기 시작해 회사도 다시 성장하게 됩니다.
도대체 영화에서는 월터가 어떻게 우울증을 극복해나가게 되었다고 표현했을까요?
바로 자기 손에 끼어 있던 비버 인형과 대화하면서부터입니다.
그러며 자신을 비버로 여깁니다.
사람들에게도 자신은 비버라고 합니다.
이것은 정신과 의사 선생님의 처방이기 때문이라고 말하니
다른 사람들도 이해해줍니다.
사람들은 월터와 이야기하지 않고 월터의 비버와 이야기합니다.
자신을 비버처럼 여기는 것은 분명 자기비하입니다. 그래서 그런 방법은 오래 못 갑니다.
하지만 주님 앞에서 내가 작아지는 것이라면 사정이 다릅니다.
우울증은 자신이 자기를 평가하는 기대치보다 못 미치는 자기 자신을 보는 것에서 옵니다.
따라서 자기를 비버로 여기는 것은 아주 좋은 생각입니다.
비버가 하는 모든 것보다 항상 더 좋은 결과들이 모이기 때문입니다.
비버는 기껏해야 나무때기로 작은 댐을 만들면 그것으로 대단한 존재입니다.
그러나 자기 스스로 비버라고 여기면 자기비하입니다.
결국, 월터는 비버 때문에 자기 팔을 잘라내야만 했습니다.
우리가 하느님 앞에 섰을 때는 우리 자신이 정말 비버보다 더 나약한 존재로 보입니다.
하느님 없이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존재임을 알게 됩니다. 그래서 기도할 필요가 있습니다.
기도하면 내가 작아 보이고 그러면 그냥 작은 일을 해도 스스로 만족합니다.
그래서 어떤 일을 계속 이어나갈 수 있는 겁니다.
로라 윌킨스는 2004년 아테네 올림픽 여자 다이빙 10m에서 미국인으로서 금메달을 획득했습니다.
다이빙은 중국 선수들에게 밀려 단 한 번도 미국이 금메달을 따보지 못한 종목입니다.
윌킨스는 올림픽을 준비하던 중 오른쪽 다리 골절상을 당합니다.
7주간 병원에 입원하였고, 그때 미국 팀의 코치와 주치의는 그녀에게 올림픽 출전 불가 판정을 내렸습니다.
얼마큼 큰 부상이었는지 정확히 알 방법은 없지만,
3년간의 준비 과정을 수포로 돌릴 만큼 심각한 부상이었던 것만은 틀림없어 보입니다.
그러나 그녀는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초기 성적은 메달 밖이었습니다.
5차에 걸친 다이빙을 하는데 3차까지 5위에 머물러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녀는 온화한 미소를 머금고 무언가 계속 중얼거리고 있었습니다.
바로 이 성경 구절이었습니다.
“나에게 힘을 주시는 분 안에서 나는 모든 것을 할 수 있습니다.”(필리 4,13)
4차에 완벽한 다이빙을 하여 바로 1위로 올라섰고 더 완벽한 다이빙으로 5차에서는 금메달을 확정 짓습니다.
그리고 어떻게 이런 기적을 이루어냈느냐고 하는 기자의 질문에 감격으로 울먹이며 이렇게 대답합니다.
“저에게 힘을 주시는 분이 이 일을 하셨습니다.”
하느님은 당신이 모든 것을 하시는 분임을 알려주십니다.
그래서 그분 앞에서는 그냥 움직일 수 있는 것만으로도 감사하게 됩니다.
그래서 무엇이라도 할 수 있다면 포기하지 않게 하십니다.
우리가 하느님 앞에서 작아질 수 있는 이유는 하느님보다 크신 분이 없기 때문입니다.
저는 저희 부모님이 많이 배우시지는 못하셨지만, 자존감이 크셨다고 믿습니다.
왜냐하면, 저희에게 맨밥을 주시면서도 미안해하지 않으셨기 때문입니다.
하루는 반찬이 없어 맨밥에 물 말아먹은 적이 있습니다.
둥둥 떠 있는 쌀벌레들을 제거하고 맨밥을 먹자니 헛구역질이 났습니다.
물론 밥을 먹다가 중간에 소위 총각김치를 찾아서 얼마나 기뻤는지 모릅니다.
그렇다고 저희는 부모를 원망하지 않았습니다.
그것이 저에게 줄 수 있는 최선임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부모님도 그렇게 주는 것에 실망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래도 굶기지 않은 것에 만족하실 수 있으셨습니다.
그래서 끝까지 양식을 거르지 않고 주실 수 있으셨습니다.
그리고 저희를 굶기지 않으신 것을 가장 자랑스러워하십니다.
오늘 복음에 완벽히 준비된 양식을 주라는 말은 없습니다. 제때에 주면 됩니다.
그렇게 못하게 되는 이유는 내 자존심 때문입니다.
준비가 되지 않았으면 그대로 때를 거르지 않고 양식을 신자들에게 주는 것이 중요합니다.
완벽함을 도모하다가 시작도 못 합니다.
완벽주의는 열등감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멈추지 않고 매일 주는 것이 필요합니다.
어쨌건 그렇게 하는게 깨어있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지 못하는 것은 내가 더 나은 양식을 줄 수 있는 존재라는 착각과 교만 때문입니다.
우리가 가장 주의해야 하는 것은 바로 자기가 한 일에 대한 실망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주님 없이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존재입니다.
무언가 할 수만 있다는 것만으로도 주님 축복이고 감사해야 할 일입니다.
내가 무언가를 하는데 실망스럽고 우울하고 멈추고 싶다면 생각하십시오.
그건 교만함 때문이란 것을. 예수님은 제때에 양식을 주라고 하셨지 그 질적인 면에서는 한마디도 하지 않으셨음을 명심하고 제때에 양식을 주고 있다면 그것이 죽이든 밥이든 깨어있음에 만족할 수 있는 겸손한 마음을 가집시다.
모든 걸 끝까지 가지 못하게 하고 포기하게 만드는 완벽주의는 주님 앞에 머물 줄 아는 사람들만 극복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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