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듣는 마음’은 자신 안의 뱀을 인정하는 것으로부터 시작된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이 세대는 악한 세대다.”라고 꾸짖으십니다.
그런데 지금 세대도 마찬가지입니다.
역사는 반복됩니다.
예수님은 이 세대가 악한 이유를 어떻게 아셨을까요? 그들이 표징을 보기 원했기 때문입니다.
듣지 않으면서 보기 원하면 악한 것입니다.
“이 세대가 표징을 요구하지만, 요나 예언자의 표징밖에는 어떠한 표징도 받지 못할 것이다.”
악한 세대는 표징을 요구합니다.
증거를 대보라는 것입니다.
자기의 불신을 깰만한 화끈한 무엇을 보여달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증거를 보여주면 의견을 바꿀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이미 그런 것으론 생각을 바꾸지 않겠다고 귀를 막아버렸기 때문입니다.
요나의 기적이란 요나가 물고기 속에서 사흘을 있다가 밖으로 나온 사건입니다.
예수님도 사흘 동안 땅속에 머물다 부활하셨습니다.
그러나 그보다 놀라울 수 없는 표징에도 악한 세대는 꼼짝하지 않습니다.
이미 귀를 막고 표징을 보여달라는 것부터 본인들은 마음이 굳게 닫혀있다고 말하는 것과 같습니다.
따라서 예수님은 솔로몬의 지혜를 ‘들으려고’ 남방 여왕이 긴 여행을 했다는 것과 니네베 사람들이 요나의 기적을 보고 믿은 것이 아니라 그의 설교를 ‘듣고’ 회개하였다고 말씀하십니다.
보는 것은 듣는 것 다음입니다. 들으려고 하지 않는 사람에게 보여주는 것은 아무 의미 없습니다.
그 마음에 이미 자기 자신으로 가득 차 있기 때문입니다.
이런 사람에게는 아무리 합당한 증거를 보여주어도 그 사람은 바뀌지 않습니다.
들으려 하지 않는다는 말은 바뀌고 싶은 마음이 없다는 말과 같습니다.
『최강의 영향력』이란 책에서 저자는 이렇게 묻습니다. ‘증거가 우리의 신념을 바꿀 수 있는가?’
이 책에서 여러 실험을 하였습니다.
첫 번째는 사형제가 범죄율을 낮춘다는 증거와 또 범죄율과는 아무 관련이 없다는 객관적 증거를 준비하였습니다.
물론 객관적 정보이기는 하지만 둘 다 편향되게 만든 그럴싸한 허위 정보들입니다.
두 그룹에 각자 하나씩의 정보를 주었더니 사형을 반대하던 학생들은 사형이 범죄율 감소에 아무 상관이 없다는 증거에 대해서 잘못되고 조작된 정보라고 반기를 들었고, 사형을 찬성하던 학생들은 범죄율을 낮춘다는 증거에 대해 제대로 된 조사가 아니라고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두 번째 실험은 온실가스에 관련된 실험입니다.
처음 환경학자가 2100년까지 지구 온도가 3.4도 오를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사람들은 이 의견에 수긍했습니다.
그리고 몇 주 후 과학자들이 정보를 재평가한 후 상황이 바뀌었다고 말합니다.
절반에게는 영향이 미미하다고 했고 다른 절반에게는 상황이 더 심각하다고 말했습니다.
이들은 바뀐 정보를 수용했을까요? 그들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3.4도 맞을 텐데?”
[참조: ‘팩트를 제시해도 신념을 바꾸지 않는 진짜 이유’, 유튜브, ‘더 나은 삶 TV’]
이것은 지금 대선 주자들에 대한 인지도 평가를 보아서도 알 수 있습니다.
서로 잘못된 일들을 아무리 쏟아내도 일단 한 번 지지한 사람에 대해서는 사람들은 좀처럼 생각을 바꾸려 하지 않습니다.
‘한국일보, 2021년 10월 5일’ 자 신문에 ‘대선이 이상하다’라는 제목의 글이 올라왔습니다.
“이재명 경기지사와 윤석열 전 검찰총장. ‘대선주자 빅2’로 불리는 두 사람에겐 특이한 공통점이 있다.
대장동 개발 특혜 의혹, 고발 사주 의혹 같은 대형 악재를 맞아도, 실언·실책으로 자질 시비가 일어도
콘크리트 지지율을 지키고 있다는 점이다.
이 지사와 윤 전 총장은 가슴을 쓸어내리고 있겠지만, 이 같은 기현상엔 그늘도 있다.
보수 진영과 진보 진영이 똘똘 뭉쳐 격돌할 채비를 하고 있다는 뜻인 동시에, 대선에서 정책·인물 경쟁이 변별력을 발휘할 공간이 지극히 좁다는 의미이기 때문이다.”
이것으로 우리는 많은 사람이 실제로 선거를 할 때 나라를 위한 대통령을 뽑으려는 것보다는 내 생각이 옳았음을 증명하려 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나를 증명하려 투표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러 증거를 제시해도 꿈쩍하지 않습니다.
나를 부정하기 싫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열린 마음’을 갖고 올바로 판단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결국, 확증편향은 의견이 곧 자신이라 여기는 오류에서 시작함을 알아야 합니다.
생각을 바꾸지 않는 이유는 자신이 부정되는 것처럼 여겨지기 때문입니다.
이런 실험이 있습니다. 서울 아파트 시세를 전혀 모르는 사람에게 32평 아파트를 보여주고 “10억 원이 넘을까요?”라는 질문을 합니다.
사람들은 10억 원 아래다, 더 나간다는 두 쪽으로 나뉩니다.
그리고 자신과 의견이 같은 사람들이 몇 명씩인지 알려주었습니다.
그랬더니 자신과 의견을 같이하는 사람이 많으면 자신감이 생겨 자신이 배팅한 가격보다 더 내리거나 더 올렸습니다.
하지만 처음 정한 의견은 바꾸려 하지 않았습니다.
혼자 남더라도 의견을 굽히지 않는 사람이 많았습니다.
자신과 의견을 같이하는 사람들이 많을 때는 더 자신의 의견을 견고하게 하지만 ‘자신이 틀렸다’는 사실은 견뎌낼 수 없는 것입니다.
사람이 들으려고 하지 않는 이유는 이렇듯 ‘자기가 부정되는 것을 두려워하기 때문’입니다.
자기 의견이 틀릴 수 있는 것은 인정하더라도 자기가 부정당하는 것은 참지 못합니다.
이것을 극복하는 유일한 길은 자기가 믿고 있었던 자신의 의견이 뱀의 것임을 인정하는 것밖에 없습니다.
하와는 뱀의 이야기를 듣고 다른 누구의 말도 들으려 하지 않았습니다.
뱀을 철저히 믿은 것입니다.
뱀의 의견이 바뀌는 것은 자신을 부정하는 것처럼 여겼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자아가 뱀임을 인정하지 않는 사람은 자기 생각이 옳다고 여기기에 귀를 막아버립니다.
들으려 하지 않는다는 말은 이미 자아를 뱀이 아니라 천사로 여기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믿어버린 것만은 잘못된 것이었음을 인정하고 싶지 않은 것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마음을 바꾸지도 않을 것이면서 끊임없이 증거를 보이라고 말합니다.
결국, 명확한 증거를 눈으로 보더라도 자기 식대로 합리화해버립니다.
따라서 듣지 않고 보여달라는 사람에게는 아무리 기적을 보여주어도 무용지물이 되는 것입니다.
솔로몬이 지혜로울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일까요? 자기가 뱀임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자기 안에 오류만 있음을 알기에 진리를 외부에서 받아들이려 했습니다.
그래서 주님께 ‘듣는 마음’을 청했습니다.
“당신 종에게 듣는 마음을 주시어 당신 백성을 통치하고 선과 악을 분별할 수 있게 해 주십시오.”(1열왕 3,9)
지혜는 듣는 마음입니다.
자신이 뱀이요, 오류요, 어둠이요, 악임을 인정할 때야만 듣는 마음을 가질 수 있습니다.
내가 뱀임을 인정하는 사람만이 외부에서 진리를 찾기 위해 책을 찾아서 읽고, 강의를 찾아서 듣고, 묵상하며
하느님 음성을 들으려 합니다.
고집불통이 되지 않는 유일한 방법은 내가 뱀임을 아는 것뿐입니다.
내가 뱀임을 알았다면 외부에서 진리를 습득하기 위해 남방 여왕처럼 진리를 찾는 노력을 반드시 하고 있을 것입니다.
이것이 악한 세대가 되지 않는 유일한 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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