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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묵상

10월 10일 _ 전삼용 요셉 신부

작성자 : 관리자 작성일 : 2021-10-10 조회수 : 1251

말씀을 실천할 것인가, 말씀과 동행할 것인가?
 
오늘 복음에서 부자가 예수님께 찾아와 영원한 생명을 얻는 방법을 묻습니다.
예수님은 계명을 지키라고 하십니다. 
그런데 그는 그런 계명은 다 지켜왔다고 말합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당신을 따르라고 하십니다. 
 
하지만 그는 예수님을 따르지 못합니다. 
부자였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따름은 버림과 가난을 전제합니다.
내가 가난해지려 하지 않으면 실제로는 예수님을 따르지 않는 것입니다. 
계명은 이웃사랑을 지향하는데 이웃이 굶고 있는데 본인만 부자로 산다면 그것은 이웃을 충분히 사랑하지 않은 증거가 되기 때문입니다. 
 
부자는 예수님께 엎드려 절하며 예수님을 ‘스승’이라고 부릅니다. 그는 스승은 ‘말’로 가르치는 대상으로 여겼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참 스승은 ‘동행’하는 것이라 말씀하십니다. 이는 실로 엄청난 차이를 만들어냅니다.
 
만약 하와가 하느님과 동행했다면 어땠을까요? 결코, 뱀의 말을 듣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다만 하느님의 ‘말씀’만을 붙잡고 있었기 때문에 그 말씀이 뱀의 ‘설득’에 지고 만 것입니다.
하지만 하느님과 뱀이 함께 눈에 보인다면 하느님 대신 뱀의 말을 듣는 일은 일어나지 않습니다. 
 
이것이 ‘듣는 것’과 ‘보는 것’의 차이입니다. 기도에서는 묵상과 관상의 차이라 할 수 있습니다.
듣는 것도 사람을 변화시키지 못하는 것은 아니지만 완전히 변화시키지는 못합니다.
만약 베드로가 예수님의 음성만 들었다면 물 위를 걸을 용기를 낼 수 있었을까요?
베드로는 예수님을 눈으로 보았기 때문에 물 위를 걸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말씀만 배우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과 함께 동행할 필요가 있는 이유입니다. 
 
영화 ‘나의 산티아고’(2015)는 이런 줄거리가 있습니다.
최고의 전성기를 누리며 부와 명예를 거머쥔 인기 코미디언 하페가 과로로 쓰러집니다.
의사는 최소 3개월을 쉬어야만 한다고 경고합니다. 하페는 잠시 일에서 떠나 산티아고 순례길에 오르기로 합니다. 
 
하지만 순례길은 만만치 않습니다. 
첫날부터 폭우와 허름한 숙소, 불면의 밤까지.
하페는 일단 걷는 것보다는 다른 교통수단을 이용해 긴 여정을 빨리 끝마치고 싶어 합니다.
잠은 고급 호텔에서 잡니다. 
도장만 받는 게 목적입니다. 
하지만 그것도 힘이 듭니다.
호텔이 없는 곳에서 벌레에게 물려가며 잠을 한 번 자고는 포기하고 돌아가려 합니다. 
 
이때 스텔라를 만납니다. 
그녀는 산티아고 순례길에서 딸을 잃었습니다.
딸은 암이었고 순례를 하다 죽고 싶다고 해서 엄마와 함께 순례하다 중간에 죽은 것입니다.
어머니는 딸을 잃은 아픔을 딸과 함께 마지막으로 걸었던 순례길을 되밟고 있었던 것입니다. 
 
하페는 뭔지 모르는 목표의식이 발동합니다. 
어머니를 잃고 돈과 성공에만 집중하며 달려왔던 길.
그리고 지금 서 있는 길은 고통과 외로움과 시간을 허비하는 듯한 시간입니다.
그러나 그 길에서 하느님을 만나고 그분을 받아들입니다.
그분께서 지금까지 자신과 함께 걸어주셨음을 믿고 정말 오랜만에 그분께 기도를 드린 것입니다.
그가 순례하는 동안 쓴 일기를 살짝 들여다볼까요?
 
“저 위에는 아무것도 없다. 내 신앙이 확고한 적이 있었다면 다시 찾고 싶다….
내 발이 길을 밟는 걸까, 아니면 길이 나의 발을 미는 걸까? 내가 생각하지 않으면 감정 표출도 감동도 없다.
자비로운 상태. 재미없지만 아픔도 없다.
가장 놀라운 건 이 여행에서 만난 사람들 모두 이 길의 힘을 전혀 의심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위대한 존재와 이 세상에 미치는 그의 놀라운 영향력을 철석같이 믿는다.
신을 만나려면 먼저 그를 영접한다고 말해야 한다. 기도하지 않는 자에게 신은 올 수 없으니까. 
 
선택권은 우리에게 있다. 누구든 신과 나름의 관계를 맺을 수 있다.
하지만 진정 사랑하는 자만이 지속적인 관계가 가능하다. 나와 너……. 나와 당신.”
 
그는 모든 것 안에서 신을 발견합니다. 눈물로 무릎을 꿇고 기도합니다. 비로소 신과 함께 하고 있음을 받아들입니다. 
“그를 만났다. 나머지는 오직 그와 나의 문제다.”
 
이제 그는 친구들을 품을 수 있는 존재가 됩니다. 무례한 여자의 손을 잡아주고 딸을 잃은 스텔라의 손을 잡아줍니다.
그리고 산티아고 대성당에 입성하여 향을 받습니다. 
 
“난 물론 혼자 간다. 이제 알았다. 사실 지금 집으로 갈 수도 있다. 하지만 왜 그래야지?
순례의 길을 걸으며 한 가지 확실한 사실은 나는 매일 신을 만났다는 거다.”
 
할머니는 하페에게 “묻지 말고 신께 의지해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하페는 신께 의지한다는 말의 의미를 비로소 알게 되었습니다.
신께 의지할 때 외로움 때문에 사람을 만나는 관계가 아니라 신 때문에 사람을 사랑하게 된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할머니의 어릴 적 신앙에 관한 말씀은 하페에게 큰 영향을 주지 못했습니다. 
그것은 단지 말씀이었습니다.
그런데 800킬로를 가는 여정 중에 하페는 하느님을 만났고 하느님과 동행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변화되었습니다. 
 
말이 사람을 변화시킬 수 있었다면 구약으로 충분했습니다. 
존재만이 사람을 변화시킬 수 있으니 예수님께서 오신 것입니다.
자캐오는 예수님의 존재를 받아들이자 비로소 가진 것을 가난한 사람에게 내어놓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욕심은 마음에서 나오는 것인데 마음은 존재에 대한 믿음만이 변화시킵니다.
 
어머니와 함께 있는 아이가 어떻게 줄곧 게임만 할 수 있겠습니까? 존재가 곧 법입니다.
그런데 그 존재가 눈에 보인다면 행동과 생각만이 아니라 마음을 움직여서 본성까지도 변화시킵니다.
이것이 우리가 자주 그리스도와 동행함을 믿고 그리스도를 보는 듯이 행동해야 하는 이유입니다. 
 
‘말씀의 전례’만 하는 것과 ‘성찬의 전례’까지 하는 것이 이 차이입니다.
말씀과 동행하는 것과 그분의 실존과 동행하는 것의 차이인 것입니다.
 
마치 베드로가 예수님을 바라보고 물 위를 걷는 것, 이것이 관상입니다.
묵상에 머무는 사람은 배 위에 있는 제자들입니다.
이 세상 삶에서부터 관상이 시작되면 언젠가 그분은 진짜 당신 모습을 보여주실 것이고 그러면 우리는 그분처럼 변화하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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