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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묵상

10월 5일 _ 전삼용 요셉 신부

작성자 : 홍보실 작성일 : 2021-10-05 조회수 : 1151

나는 기도를 통해 ‘걱정’을 없애고 싶은가, ‘불안’을 없애고 싶은가?
 
오늘 복음은 마르타가 마리아를 질투하는 내용입니다.
마르타는 예수님께 봉사하려고 열심히 활동하는 사람의 모델이고 마리아는 기도만 하려는 신앙인의 모델입니다. 
예수님은 마리아의 손을 들어주십니다. 
 
“마르타야, 마르타야! 너는 많은 일을 염려하고 걱정하는구나. 그러나 필요한 것은 한 가지뿐이다.
마리아는 좋은 몫을 선택하였다.
그리고 그것을 빼앗기지 않을 것이다.”
 
여기에서 예수님은 ‘기도’와 ‘염려’, 혹은 ‘걱정’을 대비시키십니다.
당신에게 붙어있으며 기도하는 사람은 염려와 걱정을 하지 않게 된다는 뜻이고, 반대로 말하면 기도하지 않는 모든 행위는 염려와 걱정뿐일 수 있다는 것입니다.
비록 그것이 예수님을 위해 하는 일일지라도. 
 
그렇다면 마리아는 어떤 이익 때문에 예수님께 붙어있었던 것일까요? 바로 ‘불안’을 극복하기 위함이었습니다. 
불안은 믿음으로 극복되고 염려는 깨달음으로 극복됩니다.
아이가 잠이 오지 않는 이유는 불안 때문입니다.
그 불안은 엄마 품에 안기면 사라집니다.
불안은 ‘존재적인 것’입니다.
불안이 해결되려면 ‘내가 어디서 왔고 무엇을 하러 와서 또 어디로 가는가?’를 해결해야 합니다.
이 불안은 자신을 만들어주시고 죽은 뒤까지도 책임져 줄 창조자 외에는 해결할 수 없습니다. 
 
이 불안을 잊기 위해 하는 행동이 ‘염려와 걱정’입니다. 염려와 걱정은 방향이 명확합니다.
공부하지 않은 아이는 시험이 걱정됩니다.
결과가 예상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점수를 못 받아도 부모님이 괜찮다고 안아주실 것을 확신하면 걱정이 되지 않습니다. 
미래가 확실하기 때문입니다.
사실 모든 걱정과 근심, 염려는 존재적 불안만 해결되면 같이 사라집니다. 
 
아이는 부모를 확실히 믿습니다.
자신이 부모에게서 태어났다는 것을 알지 못해도 부모가 자신에게 주는 눈빛으로도 부모가 자신을 낳고 보호해 줄 것을 믿습니다.
그런 것도 해주지 못할 것이며 자신을 낳았을 리가 없다는 것을 압니다.
누가 바로 파도에 사라질 모래 위에다 성을 짓는 노력을 하겠습니까?
 
나를 태어나게 했다면 내가 행복할 수 있는 조건을 갖추어 놓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믿기만 한다면 불안이 사라집니다.
불안이 사라지면 걱정도 없어집니다.
시험을 못 봐도 부모님은 나를 안아주시고 여전히 사랑해 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영화 ‘패신저스’(2016)는 미래에 우주선에서 시스템 오류로 90년 먼저 동면에서 깨어난 한 남자의 이야기로 시작합니다.
다시 동면으로 들어갈 수 없는 그 남자 주인공은 1년 동안 우주선 안에 있던 모든 재미있는 것들을 다 해봅니다.
심지어 대화를 나눌 로봇도 있습니다.
그러나 모든 것에 흥미를 잃고 자살을 선택하려 합니다. 
 
그러던 중 동면하고 있던 한 여자에게 관심을 가집니다. 그녀의 모든 정보와 그녀가 쓴 책 등을 다 읽고는
그녀에게 사랑에 빠집니다.
그러나 그녀를 깨워버리면 평생 자신과 둘만 살게 되어버리는 것에 분개할 것이 뻔합니다.
그렇더라도 우주선 안에는 둘이 행복할 수 있는 모든 시설이 갖춰져 있습니다. 
 
남자는 여자를 깨웁니다.
물론 시스템 오류로 그렇게 된 것으로 속입니다.
하지만 거짓말은 오래가지 않습니다.
여자는 그 남자가 혼자 외로워 자신을 깨운 것을 알게 되고 분개합니다.
그리고 그 남자와 마주치지 않고 혼자 우주선 구석에서 살아가려 합니다.
하지만 너무 외롭습니다.
어떻게 살아갈 것인지가 걱정입니다. 
 
여기서 여자의 선택은 하나뿐입니다.
그냥 혼자 외로이 분개하며 늙어 죽던가 아니면 자신을 깨운 남자의 사랑을 믿던가.
행복하게 할 자신이 없었다면 남자는 사랑하는 여자를 깨우지 않았을 것입니다. 
 
여자는 함께 지내며 남자가 자기를 위해 목숨도 아끼지 않는 사랑을 확인합니다.
자신을 사랑하던 사람이 자신을 깨워냈다면 그 우주선 안에는 자신이 도달하여 누릴 것보다 훨씬 좋은 것들이
많기 때문일 것임을 짐작합니다. 
 
여자는 남자를 믿고 살아보기로 합니다.
우주선은 자신들이 도착할 곳보다 더 아름답게 꾸미며 사는 것입니다.
그렇게 둘은 수십 년 동안 우주선을 지구처럼 아름다운 식물들로 꾸미며 최초의 아담과 하와처럼 살다가 생을 마감합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를 깨어나게 하신 분은 우리를 위해 목숨을 내어주실 수 있는 분입니다.
그만큼 우리를 사랑하신 분이 우리를 깨웠다면 이 세상에서 걱정 근심하며 두려움 속에 살기를 원치 않으셨을 것입니다.
그리고 행복하게 살 수 있는 모든 준비가 갖춰져 있어서 우리를 깨우셨을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는 불안해하지 말고 우리를 깨운 그분을 믿고 사랑하며 살면 됩니다. 
그럼 걱정도 자연스레 사라집니다.
걱정은 불안의 하위 개념입니다.
불안하니까 여러 가지 염려가 생기는 것입니다. 
 
불안은 ‘염려와 걱정’을 낳습니다.
마르타는 염려와 걱정을 해결하려 예수님을 만나는 사람이고 마리아는 불안을 해결하려 예수님의 품 안에 머물려는 사람입니다.
누가 현명하고 무엇이 꼭 필요한 것이겠습니까?
 
걱정은 하나가 해결되면 다른 것이 생겨납니다.
그러나 불안함이 그리스도의 존재로 해결되면 더는 걱정도 생기지 않습니다.
누가 현명한 선택을 한 것입니까? 
 
우리는 왜 걱정할까요? 불안함을 잊기 위해서입니다.
왜 생겨났는지 모르기에 그 불안함을 잊으려 걱정이라도 하는 것입니다.
염려하고 걱정한다는 말은 ‘내 힘으로’ 산다는 말과 같습니다.
내가 염려하고 걱정해서 이만큼이나 산다고 여기는 것입니다. 
 
그러나 걱정하면 좋은 결과가 나올까요? 몸도 버리고 마음도 버리고 나쁜 일을 불러들입니다.
걱정하는 일은 일어나게 되어있습니다.
욥기에 이런 말이 나옵니다. 
 
“두려워 떨던 것이 나에게 닥치고 무서워하던 것이 나에게 들이쳐 나는 편치 않고 쉬지도 못하며
안식을 누리지도 못하고 혼란하기만 하구나.” (욥기 3,25-26)
 
그렇다면 걱정에서 벗어나는 길은 무엇이 있을까요? 걱정에서 벗어나려면 불안의 원인을 찾아야 합니다.
불안은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모르기 때문에 생기는 것입니다.
 
잠을 자기 두려운 아이들은 부모의 품 안에서는 쌔근쌔근 잘도 잡니다.
불안하지 않으니 걱정할 것도 없습니다.
우리는 마르타보다 마리아를 닮읍시다. 
 
예수님께서 당신은 포도나무이고 나는 가지입니다. 기도는 모든 근심·걱정을 주님께 맡기는 시간입니다.
그렇게 하면 주님께서 알아서 다 해 주십니다. 하느님께서 나의 창조자이시고 우리는 그분 품에 있음을 믿으면 됩니다.
 
필요한 것은 한 가지밖에 없습니다.
자녀를 걱정하며 살아야 하는 상황에서 낳으려고 하는 부모가 어디 있겠습니까?
하느님이 나를 창조하셨다면 하느님만 믿으면 됩니다. 그 믿는 과정이 기도입니다.
 
기도를 통해 걱정은 예수님께서 주실 수 있는 것으로 해결되겠지만, 불안은 예수님의 존재와 그 믿음만으로 해결됩니다.
그리고 불안이 사라지면 걱정도 사라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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