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복음은 열 처녀의 비유입니다.
다섯 처녀는 등잔의 기름을 간직하였지만 또다른 다섯 처녀는 기름을 준비하지 못해 하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합니다.
이때 미련한 처녀들은 신랑에게 이런 말을 듣습니다.
“나는 너를 모른다.”
알텐데 왜 모른다고 하실까요?
그 이유는 이렇습니다. ‘현명한 처녀들은 그리스도를 닮으려던 사람들’이고 ‘미련한 처녀들은 그리스도를 흉내 내려던 사람들’입니다.
나를 닮으려는 사람은 사랑스럽습니다.
그러나 나를 흉내 내는 사람에겐 모욕감을 느낍니다.
적어도 나와 같은 부류는 아니라고 심판을 내릴 수밖에 없습니다.
누군가를 흉내 낸다고 해봅시다.
전에 고등학생들이 ‘관짝 밈’을 올렸을 때 흑인 비하 논란이 일었습니다.
흑인들이 춘 춤을 따라 하기 위해 얼굴도 검게 칠했기 때문입니다.
방송인 ‘샘 오취리’ 씨는 SNS에 그런 인종차별적 행동을 하지 말아 달라고 했습니다.
흑인이 한 것이기에 몸까지 검게 칠한 것은 데 이것이 흑인으로서는 모욕이 되는 것입니다.
물론 오취리 씨도 어느 방송에 나와 눈을 찢으며 동양인 비하식의 표정을 지은 적이 있다고 합니다.
이것은 동양인을 비하하는 대표적인 행동입니다.
왜 남의 행동이나 모습을 흉내 내는 것이 모욕이 될까요? 그 이유는 ‘그렇게 변할 마음이 없기 때문’입니다.
만약 우리 고등학생들이 흑인이 되고 싶어서 그렇게 했다면 그것은 흑인을 비하한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그렇게 될 마음이 없으면서 그런 모습을 취했다면 그런 흉내는 모욕이 되는 것입니다.
만약 자신을 키워준 부모의 약해진 모습을 흉내 냈다면 어떨까요? 그것은 더 못 할 짓이 됩니다.
로보트 기요사키는 『부자 아빠, 가난한 아빠』를 통해 자신은 학교 선생님인 자기 아버지가 아닌 사업가인 친구 아버지를 닮기로 해서 성공했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친아버지는 얼마나 마음이 아플까요? 물론 아들이 돈을 많이 벌어서 기쁘기는 하겠지만 아들을 키운 ‘보람’은 느끼지 못할 것입니다.
모든 부모는 자녀가 자신을 닮기를 원합니다.
이것이 자녀들을 위해 피땀을 흘린 유일한 보상이기 때문입니다.
혹은 자신을 교통사고에서 구하려다 다리를 다쳐 평생 절뚝이며 살아야 했던 어머니 앞에서 자녀는 어떤 마음을 가져야 할까요? 아이들 앞에서 자기 어머니가 아니라며 어머니를 절뚝이며 흉내 내야 할까요?
그러면 어머니 마음을 찢어질 것입니다.
그렇다면 ‘기름’이 흉내 내는 것과 닮는 것의 어떤 차이를 내는 것일까요?
기름은 당신을 닮기를 바라는 하느님께서 주시는 성령이요, 선물입니다.
사실 흉내만 내고 닮으려는 마음이 없는 사람들은 선물을 받지 않으려 합니다. 부담스럽기 때문입니다.
타이나 차트랜드와 존 바흐는 이런 실험을 합니다.
우선 두 명씩 짝을 지어 12장의 사진을 보여주고 서로에게 그 사진을 묘사하게 하였습니다.
이때 실험 참가자의 짝은 실험 조교였습니다.
한 그룹은 실험 조교가 실험자가 하는 행동을 일일이 따라 하였습니다.
다른 그룹은 그냥 평소대로 이야기를 들어주었습니다.
사진 설명이 끝난 후, 대화가 얼마나 순조로웠는지 또 자신의 파트너는 마음에 들었는지를 설문 조사하였습니다.
그 결과 조교가 자신의 행동을 따라 한 경우 조교에 대한 호감도가 따라 하지 않은 경우보다 더 높았습니다.
그리고 그만큼 대화도 더 순조로웠다고 대답했습니다.
그리고 실험 참가자들은 상대방이 자신의 행동을 따라 한 것조차 몰랐다는 것입니다.
그림을 설명해주는 것이 성령을 주는 것과 같습니다. 선물을 주는 것입니다.
그런데 내가 누군가에게 선물을 줄 때는 자기 뜻을 따라주기를 바라는 마음도 함께 줍니다.
개에게 밥을 줄 때 그 개가 자신의 말을 잘 따라주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주는 것과 같습니다.
부모는 자녀에게 양식을 주면서 자신이 바라는 대로 성장해주기를 바랍니다.
이렇든 ‘선물’에는 ‘닮기를 바라는 뜻’이 들어있고, 그 선물을 받고 자신을 닮아가는 사람을 더 좋아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느님을 닮으려는 사람은 어떤 행동을 보일까요?
성령을 받는 기도를 열심히 할 것입니다.
부모를 사랑하고 부모를 계속 닮으려는 사람은 당연히 부모가 차려주는 밥을 열심히 먹을 것입니다.
그러나 부모의 뜻을 따르지 않으려는 자녀는 부모가 차려준 밥이 목으로 넘어가지 않는 것을 경험할 것입니다.
따라서 하느님을 닮거나 흉내 내려는 사람들은 그분에게서 오는 ‘양식’인 ‘성령’을 어떤 자세로 받느냐에 의해 구별됩니다.
기도를 싫어하거나 규칙적으로 하지 않는 사람은 그 선물을 받아 하느님의 뜻대로 닮기를 원하지 않는 사람입니다.
오늘 미련한 다섯 처녀가 그런 여인들이었던 것입니다.
성령은 부모가 자녀에게 주는 ‘양식’과 같습니다. 양식을 계속 먹으면 그 사랑에 감사해서 그 감사가 그것을 주는 부모를 닮게 만듭니다.
아이들이 두 발로 걷고 말을 하고 심지어 걸음걸이, 말투까지도 부모를 닮게 되는 이유가 이것입니다.
그렇기에 계속 부모를 닮고 싶으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분명 양식을 꾸준히 받아먹을 것입니다.
만약 밖에서 먹고 살다가 정 배가 고플 때만 집에 들어와 밥을 먹는다는 말은 더는 부모를 닮은 마음이 없기 때문이라는 것과 같습니다.
우리는 하느님께서 보내신 성령을 통해 맺은 열매를 지니고 그분 앞에 나아가야 합니다.
사랑이 아닌 미움, 기쁨이 아닌 우울함, 평화가 아닌 걱정, 절제가 아닌 방탕, 온유함이 아닌 분노, 겸손이 아닌 교만을 지니고 가지만 주님은 또 말씀하실 것입니다.
“나는 너를 모른다.”
창조는 고통이 따릅니다.
그만큼 고통이 따랐다면 자기가 만들고 싶은 모습으로 변화되는 것이 가장 큰 보람입니다.
자녀가 식사를 규칙적으로 할 때는 아직 나를 닮게 할 여지가 있지만, 그렇지 않다면 부모는 더는 변화시킬 힘을 지니지 못합니다.
흉내가 되지 않도록, 우리 본성을 바꿔주는 성령님을 꾸준히 모시는 습관이 필요합니다.
이것이 현명한 처녀가 되는 길입니다.
규칙적인 기도습관. 규칙적으로 기도하는 사람은 분명히 하느님을 닮아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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