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 자체를 즐겨야 한다고 합니다. 그러나 말처럼 쉬울까요? 며칠 전, 대기업에 다니고 있는 어느 형제님을 만났습니다. 이 형제님은 제게 “신부님은 하고 싶은 것을 하니 얼마나 좋으십니까?”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면서 자신은 마지못해 회사에 다닌다는 것입니다.
이 형제님은 입사 시험을 보고서 회사에 들어왔습니다. 그때 회사에 들어오고 싶은 마음이 얼마나 컸겠습니까? 분명히 자신이 가지고 있었던 소원이었고, 이를 이룬 것인데도 마지못해 다니고 있다고 말합니다. 분명 이 형제님도 하고 싶은 일을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부정적인 마음이 생기면서 하고 싶었던 일이라는 것 자체를 잊어버린 것이지요.
사실 일은 즐길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재미로 하는 취미와는 전혀 다르기 때문입니다. 어느 가수가 이런 말을 합니다. 음악이 좋아서 가수가 되었는데, 가수가 된 후 음악을 즐기기가 쉽지 않다고 말이지요. 취미로 하는 음악에서 일로 하는 음악이 되다 보니 책임이 동반되고 이로 인해 부담감이 커질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결국 나의 마음이 좋아했던 것을 싫어하게 만들기도 있고, 간절히 원하는 것이 가장 벗어나고 싶은 것이 되게도 합니다. 어떤 마음을 간직하느냐가 중요합니다.
오늘 우리는 성녀 마리아 막달레나 축일을 지냅니다. 축일에 맞춰서 십자가의 죽음으로 무덤에 묻히신 예수님을 찾아가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예수님을 통해 회개한 뒤에 커다란 변화를 가져왔던 그녀였습니다. 그 은혜가 너무 컸기에 무덤을 찾아갔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곳에 예수님의 시신이 없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미리 말씀하셨던 바처럼, 사흘 만에 부활하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그녀에게 “여인아, 왜 우느냐? 누구를 찾느냐?”라고 물으십니다. 이때 마리아가 예수님을 알아보았을까요? 그토록 사랑하고 존경하는 예수님인데도 불구하고 가까이에서 말씀하시는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합니다. 그래서 정원지기로 생각합니다.
그녀가 가지고 있었던 마음 때문이었습니다. ‘죽은 사람은 다시 살아날 수 없다’라는 고정된 마음이 예수님을 알아볼 수 없게 만들었던 것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났으니 가장 기뻐해야 할 순간에, 예수님 시신이 없어졌다고 슬퍼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의 마음을 바로잡아야 합니다. 부정적인 마음이 아닌 긍정적인 마음으로, 미움의 마음보다는 사랑의 마음으로 바로잡을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내 곁에 계신 예수님을 알아볼 수 있으며, 내 이름을 부르는 예수님을 향해 “라뿌니!”하며 기쁨의 응답을 하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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