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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묵상

7월 21일 _ 전삼용 요셉 신부

작성자 : 홍보실 작성일 : 2021-07-21 조회수 : 1999

빛은 어둠 속에서, 앎은 모름 속에서만 보인다.
 
오늘 복음은 씨 뿌리는 사람의 비유입니다.
씨는 말씀이고 진리입니다. 
이 진리가 우리 안에 뿌려지지만 어떤 사람들은 ‘들을 귀’가 없어서 씨가 뿌려져도 열매를 맺지 못합니다. 
 
비유를 깨달아야 열매를 맺을 수 있는데 마음이 무디고 눈은 감겼고 귀는 닫아버렸기에 말씀이 그 사람 안에서 변화를 일으킬 수 없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들을 귀’는 무엇일까요? 우리가 어떻게 하면 열린 마음으로 들을 수 있을까요? 방법은 하나뿐입니다.
모른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검사 출신의 변호사인 금태섭 씨가 쓴 『확신의 함정』 책의 머리말 소제목은 “누구나 틀릴 수 있다.”입니다. 
 
법을 집행하면서 확신을 하지 않으면 재판에서 질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그는 오랜 법조인 생활을 한 끝에 누구나 틀릴 수 있다는 진리에 도달했습니다. 
 
이 책의 머리말에서 그는 검사 초년 시절 자신 앞에서 한없이 울던 막 12년의 복역을 마치고 나온 서른 살의 한 사람을 떠올립니다.
그랜저를 훔쳐서 잡힌 사람이었는데, 큰 죄도 아닌 작은 범죄를 여러 번 저질러서 결국엔 12년을 살다가
이제야 출소한 것입니다.
만약 법대로 하면 그를 다시 7년 이상은 집어넣어야 하는 상황이었습니다.
하지만 변호사도 와서 사정하고 자신도 그 사람을 장발장으로 만들 수 없어 결국 그 사람은 집행유예를 받게 됩니다.
 
그러나 그 이후로 그는 차를 상습적으로 탈취하고 그 안에 탄 사람들을 폭행하며 돈을 빼앗는 등의
중범죄를 계속 이어갔습니다.
그렇게 수많은 사람이 그 사람 때문에 피해를 보게 되었습니다.
검사는 다시 범죄 기록과 그랜저를 훔친 정황을 살펴보았습니다.
분명 놓친 것이 많았습니다.
그는 검사 앞에서 연기하고 있었고 검사는 자신의 판단을 믿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는 이런 말을 합니다. 
 
“누구나 틀릴 수 있다. 사건을 수사하거나 변론을 하다 보면, 분명히 내 판단이 맞는다고 생각하는데 질 때가 있다.
의뢰인이 가장 억울하겠지만, 어떤 경우에는 나도 너무 분해서 잠이 안 올 때가 있다.
 
그러나 누구라도, 자신의 판단이 반드시 옳다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없다.
저 사건을 처리할 때 나는 내가 인간적이고 합리적인 결론을 내렸다는데 한 치의 의심도 없었다.
그렇지만 나는 틀렸고, 또 틀렸을 뿐만 아니라 그 사실을 너무 늦게 알았다.”
 
틀릴 수 있다는 것을 알면 신중해집니다.
그러나 모든 것에 확신으로 가득 찬 사람은 자신이 안다고 믿는 것 때문에 많은 오류에 빠지게 됩니다. 
 
지금은 ‘양자역학’이라 하는 것이 일반화되어 심지어 양자컴퓨터까지 개발된 상태입니다.
하지만 그 머리가 좋다는 아인슈타인도 양자역학이 처음 나왔을 때 “신은 주사위 놀이를 하지 않는다.”라며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과학에 대해 잘은 모르지만, 양자역학은 ‘불확정성의 원리’를 지니고 있다고 합니다.
양자역학에서 보어는 상보성 원리를 주장하며 전자는 입자로 존재할 때는 특정 위치에 존재할 수 있지만,
파동으로 존재할 때는 중첩 현상으로 명확히 어디에 존재하는지 규정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저도 무슨 말인지 잘 모르니 물어보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런데 입자나 파동도 관찰자가 있느냐, 없느냐에 따라 다르게 측정됩니다.
관찰자가 있다면 빛이 입자로 보이다가 관찰자가 보지 않으면 파동으로 활동한다는 것입니다.
미시세계로 갈수록 도대체 인간의 능력으로는 무언가를 확정할 수 없다는 내용이 양자역학에 들어있는 것입니다. 
 
물리학의 입장에서는 세상은 숫자로 이루어져 있기에 인과응보가 정확한 계산으로 예상할 수 있지만,
양자역학의 세상에서는 그것으로 측정될 수 없다는 논리입니다.
만약 아인슈타인처럼 인간이 다 알 수 있다고 말한다면 양자역학의 세계는 받아들여질 수 없는 것입니다.
닐스 보어는 말합니다. 
“아인슈타인 씨, 신이 무엇을 할지 당신이 결정하지 마시오.”
 
제가 초등학교 때 복사를 했기에 방학 때는 성당에 매일 나가야 했습니다.
그런데 중간에 가게 하나를 지나쳐야 했는데 그렇게 매일 성당에 출근하는 저를 보며 왜 신을 믿느냐는 것입니다.
신을 믿으려면 태양을 믿으라고 합니다.
자신은 태양을 믿는다는 것입니다.
태양이 없으면 누구도 살 수 없으니 태양이 곧 신이라고 했습니다.
저는 ‘태양을 만드신 분을 믿어야지.’라고 속으로 생각하며 그냥 웃을 뿐이었습니다.
저는 모르는 사람이었고 그분은 아는 분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분은 모르는 사람이 되었고 저는 아는 어린이였습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려는 것은 ‘진리’의 말씀입니다.
이 진리의 말씀이 우리 안에서 받아들여지려면 우리는 ‘비진리’, 곧 진리가 아님을 고백해야 할 수밖에 없습니다.
내가 알고 있다고 여기는 만큼 진리는 내 안에서 뿌리를 내리지 못합니다.
복음 묵상을 할 때도 이전에는 ‘다 했던 것인데 또 뭐 새로운 묵상이 나올 수 있을까?’라는 생각을 한 적이 있습니다.
그런데 지금 보면 볼수록 더 깊은 내용이 있음을 발견하게 됩니다.
내가 다 안다고 규정해 놓는다면 더 깊은 진리는 깨달을 수 없을 것입니다. 
 
이 때문에 영성에서는 『무지의 구름』과 같은 책이 나오는 것입니다.
무지의 구름이란 모세가 하느님을 만나 계명 판을 받기까지 40일간 구름 속에서 있었던 상태를 의미합니다.
이때 주님 앞에서 모세는 아무것도 모르는 어린이와 같은 존재였습니다.
누구보다도 몰랐기 때문에 전부를 알게 된 것입니다.
 
우리는 모릅니다.
나훈아 씨는 인생 막바지에 와서 ‘소크라테스’를 찾으며 인생도 사랑도 모르겠다고 고백합니다.
드디어 조금 알게 되었다고 볼 수 있는 것입니다. 모른다고 고백해야 그분께서 주시는 진리의 말씀을 받을 귀가 열립니다.
내일도 모르고 한 시간 앞도 모릅니다.
그러니 대화할 때 결론을 내며 대화를 끊어서는 안 됩니다.
모른다고 생각할 때 귀가 열리고 대화가 흘러갑니다. 그러면 모든 것을 아시는 분이 알려주십니다.
모든 것에 모른다고 말할 수 있는 겸손이 모든 것을 아시는 분의 말씀 앞에서 귀를 여는 방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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