완벽주의는 비난받아야 할 문제인가?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당신께서 보내실 성령님은 ‘진리의 영’이라고 하십니다. 진리의 영이 오시지 않으면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하시는 말씀을 다 이해할 수 없습니다. 그러니까 성령님은 우리에게 그리스도의 말씀을 이해시켜주시는 선생님과 같은 분이십니다.
예수님은 성령님과의 관계에 대해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그분께서는 스스로 이야기하지 않으시고 들으시는 것만 이야기하시며, 또 앞으로 올 일들을 너희에게 알려 주실 것이다.”
하느님은 완전한 분이십니다. 그런데도 예수님은 아버지에게서 들은 대로만 이야기하고, 성령님은 예수님에게서 들은 대로만 이야기하십니다. 하느님께서 완전하시고 완벽하시다면 왜 당신의 완벽함을 드러내지 않으시고 시키는 대로만 하시고 들은 대로만 말씀하시는 것일까요? 완벽해지려는 마음을 포기해야만 완전해지는 것일까요?
현시대에 ‘완벽주의’란 굉장히 부정적인 의미로 쓰입니다. 열등감이 있는 사람이 인정을 받기 위하여 일을 완벽하게 해내기 위해 고생하는 이미지가 있습니다. 물론 맞는 말일 것입니다. 그러나 완벽주의가 잘못된 것일까요? 아닙니다. 예수님은 우리보고 아버지처럼 완전해지라고 하십니다.
그렇다면 무엇이 문제일까요? 내가 완벽해지고 완전해져서 영광을 받는 대상이 누구냐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 영광이 나에게 오면 진정 그 완벽주의는 병적인것이고, 내가 완벽해져서 나를 완벽하게 한 분이 영광을 받으면 그런 완벽주의는 참으로 좋은 것입니다. 그런 사람은 완벽주의라도 스트레스를 받지 않습니다.
오히려 태어난 것으로도 이미 완전한 것이니 그냥 놀면서 설렁설렁 살아도 된다는 식의 위로를 하는 것이 더 나쁩니다. 만약 여러분이 작품을 만든다면 설렁설렁하게 작품을 만드시겠습니까?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만드시면서 우리가 완전해지도록 창조하셨습니다.
나의 자녀가 “아빠, 나 개랑 똑같지?”라고 하면 겸손하다고 칭찬해 줄 부모는 아무도 없습니다. 부모처럼 완전해져야 하는 것은 자녀의 도리입니다. 다만 자신이 아닌 키워준 부모의 영광을 위해 완전해져야 합니다.
‘완벽주의’ 하면 떠오르는 인물이 봉준호 감독입니다.
봉준호 감독은 소위 ‘봉테일’이라고 불릴 정도로 자신이 계획한 시나리오의 모습대로 완벽한 디테일의 연기나 장면이 나오지 않으면 잠을 이루지 못하는 성격입니다. 봉 감독도 자신은 심각한 불안, 강박적 완벽주의자라는 진단을 받았고 신경정신과 약도 먹는다고 말합니다.
그는 영화 구상에만도 엄청난 시간을 쏟는데, 예를 들면 ‘설국열차’는 무려 9년을 계획하였고, 기생충은 기본 골격과 캐릭터를 구축하는 데에만 5년을 소비했습니다. 자신이 촬영대본을 그린대로 장면이 나오지 않으면 절대 만족하지 않습니다.
영화 ‘마더’를 촬영할 때 김혜자씨에게 같은 장면을 30번이나 반복해서 찍은 것은 큰 일화로 남아있습니다. 젊은 배우도 아니고 원로급 배우에게 한 장면을 30번이나 반복하게 한 것은 가히 고문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런 그가 어떻게 그 강박적 완벽주의를 극복하고 아카데미상에서 ‘기생충’으로 6관왕에 오를 수 있었을까요? 바로 자신과, 일하는 사람들과, 관객들의 행복을 더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는 김혜자 씨에게 같은 장면을 30번 반복하게 하면서도 결코 화를 내는 일이 없었습니다. 누구에게도 화를 내지 않는다고 합니다. 그렇게 해야 결국 김혜자 씨에게도 좋은 일임을 일깨워줍니다. 완벽주의는 나 자신의 영광을 위하는 마음에서 나옵니다. 그러나 타인의 영광을 위할 때 그 완벽주의는 좋은 것으로 승화될 수 있습니다.
그의 완벽주의를 극복하게 만드는 한 사람이 있는데 그의 단짝 송강호 씨입니다. 송강호 씨가 오디션에서 매번 퇴짜 맞던 시절 봉감독은 그를 위로하는 문자를 보냈고, 나중에 송강호 씨가 인기가 높아졌을 때는 오히려 봉준호 감독을 도와주었습니다. 봉준호 감독은 송강호 씨가 자신의 완벽주위에서 오는 불안을 해결해 주는 알약과 같은 존재라고 말합니다.
“의사들은 항상 약을 권하지만, 시나리오를 쓸 때는 더듬이와 촉수가 예민해야 하기에 약을 먹을 수는 없습니다. 그런 제게 송강호 선배님은 인간 알약입니다. 형님을 보고 있으면 마음이 안정됩니다. 저 형님과 함께하면 뭐든 찍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언제나 나를 지지해 줄 것 같습니다. 이런 느낌은 ‘살인의 추억’을 함께 하며 알게되었습니다.”
[참조: ‘어떻게 봉준호는 강박증+완벽주의+예민한 성격을 이겨내고 ...’, 유튜브 채널, ‘김대리의 만물사전’]
나에게 고마운 누군가가 생기면 그 사람을 영광스럽게 해 주고 싶은 마음이 생기기 때문에 저절로 나 자신을 위하는 불안한 마음이 해소됩니다. 완벽주의는 좋은 것입니다. 그러나 내가 완벽해지게 만드는 것에 고마운 분들이 많아야만 합니다. 어떤 누구도 자신을 위해 살면 행복할 수 없습니다.
특별히 말하는 것에서 이런 것들이 잘 드러납니다. 우리가 하는 말은 다 누군가를 영광스럽게 하기 위한 목적이 있습니다. 그리고 결국 타자를 영광스럽게 하는 말이 아니면 다 자기 자신을 영광스럽게 하는 말입니다.
하느님조차도 당신 자신을 위해 말하지 않으십니다. 당신을 파견하신 분의 영광을 위해 말합니다. 자기 영광을 위해 말하면 행복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자기 자신의 영광을 생각하면 근심이 커집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성령님에 대해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그분께서 나를 영광스럽게 하실 것이다. 나에게서 받아 너희에게 알려 주실 것이기 때문이다.”
성령님은 완전하신 하느님이십니다. 그 완전함을 그리스도를 영광스럽게 만드심으로써 가지게 되십니다. 그리고 그리스도는 아버지를 영광스럽게 만들기 위해 완전해지십니다. 우리는 우리가 받은 성령님을 영광스럽게 하려고 완전해져야 합니다. 그러려면 그분께 온전히 순종할 수 있어야 합니다.
성령님께 영광을 돌리는 말을 하려면 영감을 주시는 성령님께 감사한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그 보답으로 영광스럽게 하려는 말과 행동이 나오는 것입니다.
고마움에 보답하는 방법은 말과 행동이 그분으로부터 받은 것을 전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나의 영광을 추구하지 않기에 마음이 평화롭습니다. 동시에 하느님의 완전함을 품게 됩니다. 그리스도인의 완벽주의를 추구합시다.
(전삼용 요셉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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